중국 고대문명 연구의 지역주의와 의고·신고

서론

세계 고대문명 연구에서 중국은 어떤 위상을 지닐까? 그 방대한 연구의 역사에서 중국의 사례가 어떤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시론으로 기획된 이 연구는 중 국 고대문명 연구사의 주요 흐름을 살펴보고, 거기서 두드러진 두 가지 핵심 키워드로 “지역 주의”와 “疑古·信古 논쟁”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지역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어질 터인데, 1920년대 서방기원설에서 비롯되어 세계 문명사 연구에서 중국 고대문명 연구가 지역 화되어 가는 양상과 1981년 출간된 북경대학 蘇秉琦(1909-1997)의 신석기시대 區系類型論에 서 비롯된 새로운 지역주의가 그것이다. 흔히 4대문명1) 중 하나로 알려진 중국은 고대문명 발전사에서 후발주자에 속한다. 메소포타 미아와 이집트는 기원전 3500년쯤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제3천년기부터 연대기 같은 기록물을 남겼다. 반면에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중국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과 청동기 金文은 대략 기원전 1200년경부터 나타난다.2) 중국학계에서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혹은 왕조, 하나라 유적으로 공인하는 二里頭도 그 최대 상한 연대가 근동의 고대국가 유적들보 다 1천년 이상 늦은 기원전 20세기 정도다.3) 역시 기원전 2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중국 청동 기 시대의 개시 연대도 기원전 제4천년기까지 올라가는 근동 지역보다 상당히 늦다. 그렇지만 고대 중국이 남긴 학술 방면의 자료는 여타 고대문명과 비교하여 풍부한 편이다. 2011~12년 총 5권으로 완간된 옥스퍼드 역사서술의 역사 제1권(시초부터 서기 600년까지) 은 전체 24장 중, 메소포타미아에 2장, 이집트에 1장, 이스라엘에 1장, 그리스에 4장, 로마에 6장, 인도에 2장, 중국에 가장 많은 8장을 할애했다.4) 商代 갑골문과 周代 金文, 전국시대 楚 簡, 秦漢 簡牘 등 출토문헌과 五經과 제자백가서, 史記와 같은 역사서 등이 그 자료의 주종 을 이룬다. 중국의 고고학 발굴 상황 역시 비슷하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늦게 1920년 대 과학적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부터야 대규모 발굴이 진행 되었다. 그럼에도 여느 고대문명 못지않은 성과를 축적해오고 있다. UCLA의 고고학자 로타 팔켄하우젠은 중국의 고고학을 “오늘날 학문 세계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역동적인 분과 중 하나”로 간주한다.5) 이러한 역동성은 풍부한 자료 못지않게 후대까지 “장기적 지속성”이라는 중국 문명만의 특 징6)과 함께 고대 이래 유지되어온 중국의 好古 혹은 尊古 전통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확고했을 중국의 호고주의 전통7)은 1899년 갑골문의 발견 및 1920년대 부터 시작된 고고학 발굴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따라서 서두에서 언급한 고대 중국 연구에서의 지역주의와 의고·신고 논쟁을 검토하기 위한 주요 전제로서 현재까지 중국 고대문 명 연구를 이끈 호고주의와 고문자학, 고고학의 발전을 우선 개괄할 필요가 있다. 통상 고대 중국의 하한은 진한시대(221BC-220AD)지만, 지면 관계상 이 글은 대체로 先秦시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중국의 호고주의 전통

호고주의로 번역되는 “antiquarianism”은 원래 유럽적 현상에 맞춰 만들어진 유럽의 용어 다. “고대를 연구하는 고기물 학자(antiquaries)가 고대의 유물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서도 수행하는 과거에 대한 조사를 일컫는다.”8) 고대의 부활로서 르네상스의 정의가 바로 고대학(the study of antiquity)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듯이,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 들에 의해 본격화된 호고주의가 17세기와 18세기에 문학과 건축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 다. 호고주의 관행의 기원은 로마의 마르쿠스 테린티우스 바로(Marcus Terrentius Varro, 116-27 BC)나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까지 소급되기도 한다. 위의 정의에 “(유물의) 전승 과정에서 생겨난 파열에 대한 가교” 역할을 추가한 팔켄하우젠 은 호고주의와 연관된 중국의 문화적 관행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갑골문에서 비롯되어 사 기에 이르는 도덕적 교훈적 역사서술 전통, 山海經 및 水經注 같은 여행용 지리서와 민 족지 전통, 유교 경전 연구에 기반한 문헌학 전통, 군주들의 고기물 수집벽, 당송대 서예 전통 으로 구현된 과거 모방하기, 11~12세기에 새로운 학술로 부상한 금석학.9) 나아가 송대 금석 학에 선행한 고기물 위주 호고주의의 구체적 사례로 상 후기(기원전 12기경) 은허의 婦好墓에 서 출토된 신석기시대(紅山文化와 石家河文化 계열) 옥기, 商周 청동기에 나타나는 擬古的 양 식, 秦 통일 전후의 고풍 서체, 周禮를 이상화한 王莽 시대의 동전과 부장품 조합에서 나타 나는 복고주의,10) 후한대 화상석에 유교의 도덕적 가치를 반영한 복잡한 도상적 구도에 따라 배열된 신화적 고대의 인물과 에피소드들, 인도의 원형을 추구한 위진남북조시대 불상에 나타 나는 시각적 擬古主義, 陝西省 何家村의 唐墓(755년에 조성)에서 발견된 동주시대 이래의 시 대별 동전 수집, 송의 개국 시점(10세기)에 편찬된 고대 禮器 도록으로 금석학의 흥기에 영향 을 미친 聶崇義의 三禮圖 등을 들고 있다.11) 이러한 호고주의 양상은 11세기 중엽부터 “과거에 대한 관심 폭발”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양적, 질적으로 큰 변혁을 맞이한다.12) 송나라 황실과 사대부들은 고대의 기물들을 열정적으 로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여 고기물이 출토된 현장으로 달려가 기물들을 통째로 수집하거 나 골동품 시장에서 고가에 구매했다. 소장품의 규모가 커지면서 궁정이나 개인의 저택에서 전시했고, 기물의 탁본과 線畫(line drawing) 같은 새로운 기술을 토대로 고기물의 형상을 체 계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장르의 저작들이 출현했다. 흔히 포기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나 플라비오 비온도(Flavio Biondo, 1392–1463) 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호고주의에 비견되는 송대의 고기물 애 호와 연구13)는 “(하상주) 삼대로 돌아가자”는 슬로건과 함께 堯舜을 비롯한 상고시대 성왕의 도통 추구를 지상과제로 삼은 송대 도학자들의 염원14)과도 상통한다. 고대에 대한 이전의 관 심은 대체로 경전과 문헌 위주의 經史에 치우쳐 있었다. 하지만 歐陽修(1007-1072)와 李公麟 (1049-1106), 呂大臨(1044-1091), 董逌(1120년경 활동) 등의 고기물 수집과 연구는 기존에 확립된 문헌 전통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고대 기물 증거에 비추어 고대를 이해하려 했음을 보 여준다. 그 핵심에는 주로 상주시대의 청동예기를 통해 고대의 의례를 다루는 “金”과 1~8세기 의 비문을 다루는 “石”, 즉 금석학이 있었다. 둘은 소재는 달랐어도 명문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송대의 고기물 연구자들은 청동기 명문을 통해서 진시황의 焚書로 단절된 삼대 황금시 대 성왕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자 했고, 생생한 비문을 통해서 전통 역사서술을 비판적으 로 바라보기도 했다. 고기물 속의 명문이 경전에 대한 주석의 집적으로 창출된 이전의 문제의 식에 대처하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하여 고대의 이해에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송대의 학문적 성취

는 20세기 이후에야 고고학의 원조 격으로 주목되었다. 王國維 (1877-1927)가 최초로 송대 학자들의 고기물 수집과 저록, 考訂, 응용 등에 주목하여 금석학 을 송대의 뛰어난 학술로 자리매김했고,16) 梁啓超(1873-1929)는 고고학이 북송대의 고기물학 에서 비롯되어 중국사에 뿌리 깊은 전통을 지녔음을 강조했다.17) 하버드대학에서 구미의 중국 고고학 연구를 선도한 장광즈(張光直, 1931-2001)도 상에서 한대까지의 청동기 210점과 옥기 13점을 수록한 최초의 본격적 고기물 도록인 呂大臨의 考古圖(1092년)를 중국 고고학사의 2대 표지 중 하나로 꼽으며,18) 鼎이나 饕餮 같은 고대 청동기 관련 명칭을 제시한 송대 고기 물 연구가 일부 착오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의 고고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했다고 보았다.19) 그렇지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20) 1923년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로서 56년 동안 길을 연 李濟(1896-1979)21)는 송대의 성취 에도 불구하고 고기물학이 추구한 鑑定的 한계에 주목한다. 기물을 수집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이나 출처를 도외시하며 명문을 지닌 기물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 었다고 본다. 이러한 한계가 학술적으로도 주로 역사적, 문헌학적 연구만을 주요 대상으로 삼 게 하여, 현대 고고학의 종합적, 맥락적 연구에 상응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일리 있는 지적이다. 다만 근대적 과학 발전이 요원했던 송대의 상황에서, 세나(Sena)가 주목한대로,22) 문헌의 한계를 보완하는 교차 검증 대상으로서 고기물의 중시는 최소한 현대의 역사고고학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송대 이후 호고주의 전통이 쇠퇴했다는 주장23)도 2000년대 이후의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반박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을 종합한 팔켄 하우젠24)은 금나라의 중원 정복으로 인한 송 황실 소장품의 유실로 청동기 연구에서 일시적 쇠퇴가 있었을 뿐, 송대의 청동기 도록이 후대에 계속 재판될 정도로 금석학은 번성했다고 본다. 이와 함께 송대 이래의 호고주의적 미학이 유교의 영향권에 있던 동아시아 엘리트의 삶을 규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17세기 이후 학문의 중심이 “철학”에서 증거 위주의 “문헌학”으로 전환됨으로써, 고기물 학자들의 초보적 발굴을 수반한 활발한 현장 조사가 다시 중시되었고, 금석학의 발전으로 문헌에 치중한 고증학자들의 연구도 신빙성 있는 명문을 통해 보완되었 다.25) 과학적 고고학의 기준에는 미달하더라도, 이를 통해 20세기 현대 고고학을 수용하려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었다는 것이다.26) 팔켄하우젠은 송대 금석학에 맥이 닿아 있는 고증학이 20세기 초 顧頡剛의 비판적 의고 학풍(후술)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