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강 중류 유역 제2차 도시화와 힌두 신화의 역사화

인더스문명이 사라진 지 약 1,000년 만에 인도아대륙에서 다시 도시 문명이 발생한다. 그 위치는 갠지스강 중류 유역이고, 그 시기는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세기부터 마우리야 제국이 성립하는 기원전 4세기 사이다. 인더스문명이 몰락한 후 아리야인은 아프가니스탄과 뻔잡을 지나 동진(東進), 지금의 델리 지역과 갠지스강 상류 유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회채색 토 기를 주로 사용한 소규모 촌락 상태를 유지하다가 점차 비교적 큰 정착지로 발전하고, 기원전6세기경이 되면서 북부흑색연마토기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도시와 영역국가(마 하자나빠다 mahajanapada)가 발생한다. 이 제2차 도시화는 철제 농기구가 본격적으로 사용 되면서 일어난 것으로, 철제 농기구의 폭넓은 사용으로 잉여 생산이 크게 발생하고, 그 위에 서 교역이 활성화되고, 시장이 커지면서 영토를 확보하는 영역국가가 북부 인도 전역에 열여 섯이나 발생한다. 그들 간의 정복 전쟁이 지속되고, 결국 갠지스강 중류의 마가다(Magadha) 의 마우리야조가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계급(바르나varna, 즉 카스트) 간의 대립이 첨예 해지고, 제사와 의례 그리고 물질 중심의 도시 문명이 확대되면서 이에 반발하는 반(反)제사 의례의 우빠니샤드(Upanishad) 사상과 불교 및 자이나교가 형성된다.

제2차 도시화 즉 갠지스문명

제2차 도시화 즉 갠지스문명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주로 철기 사용이 도시화에 어떤 영향 을 끼쳤는가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1960년대에 학계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가 제기된 이래, 기원전 10세기경 철 기술이 인도아대륙의 토착민들에 의해 여러 곳에서 발전하 고, 기원전 500년경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도시 문명이 획기적으로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14) 논쟁은 갠지스강 중상류 유역에 울창한 삼림이 존재했고, 그것을 제거하는 데 철제 도구가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고 주장한 꼬삼비(D.D. Kosambi) 의 주장으로부터 촉발된다.15) 이어 샤르마(R.S.Sharma)는 기원전 6세기에 갠지스강 중상류 유역에서 쟁기와 같은 철기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고, 인구가 증가 하여 도시화가 갠지스강 중상류 유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폭넓게 논증했다. 그는 알라하바드(Allahabad)의 동쪽과 라즈마할(Rajmahal) 구릉의 서쪽 지 역에 몬순기에 내린 많은 양의 비로 인해 삼림이 우거졌고, 이를 제거하고 충적토 농지를 확 보하는 작업에서 철제 도끼가 큰 역할을 하였으니, 철제 쟁기, 낫, 삽 등을 이용한 농업은 전 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전개되었고, 이 빠른 속도의 기술 혁신이 대규모의 잉여 생산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16) 샤르마는 또,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쌀농사가 이앙법의 확산으로 1년 이모작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그러한 기술의 발전 아래에서 철기 생산 도구를 더 많이 소 유하고 경작지를 더 많이 확보한 부유한 계층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이 바르나(varna 카스트)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졌다면서, 부유한 권력층은 성곽을 구축하여, 그곳을 군대의 본부 로 사용하였으며, 그것이 점차 커지면서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17) 꼬삼비와 샤르마 두 사람의 주장은 생산 도구의 기술 혁신이 사회 변화를 가져온다는 전형적인 마르크 스주의 역사관에 입각한 이론인데, 고든 차일드(Gordon Childe)가 철제 도구가 이동 수단을 크게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지중해 유역의 도시 혁명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 이론을 원 용한 것이다.

꼬삼비와 샤르마의 철기 프레임

에 처음으로 의문을 던진 이는 고고학자 고쉬(A. Ghosh) 다. 고쉬는 1973년에 철제 도구가 삼림 제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으니, 삼림은 주로 불을 질러 태움으로써 해결했는데, 철기가 아직 널리 사용되지 않은 곳에서는, 동기와 청동기 가 팽창에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느리게 이동하는 사회에서는 철의 영향 또한 느리게 일어나기 때문에, 철로 인해 물질적 번영이 급하게 일어났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8) 고쉬의 문 제 제기를 이어받아 고고학자 짜끄라바르띠(D.K.Chakrabarti)도 철기의 절대적 역할보다는 정치적 역할이 도시화에 훨씬 중요한 요소로 작동했다고 주장하는데, 갠지스강 유역에 철이 처음 나타난 시기에서 도시 문명이 나타난 시기까지 400년이 걸렸고, 철기를 널리 사용했다 해서 그것으로만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고, 인도 남부의 예를 들며, 남부에서도 신석기 -금석병용기 시대 사람들에 의해 철기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어떠한 농경지 팽창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지역이 역사 시대로 들어가게 된 것은 마우리야 제국 정부와 당시의 사회 제도의 영향에 의해서라고 주장한다.19) 이에 대해, 타빠르(Romila Thapar)는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 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도시 문명은 잉여 생산에 이어, 인구 증가, 쌀농사, 새로운 토지 필요에 따른 이주, 성채 주거지, 교역, 주화, 문자 그리고 새로운 종교의 발전과 그에 이른 국 가의 발생과 사회 체제 완비 등은 모두 철제 도구의 광범위한 사용에 따른 연속된 결과이기 때문에 철기가 차지하는 도시화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은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다

논쟁은 인도아대륙에서 철기

언제 시작하고,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하였는지의 문제 로 이어진다. 고고학자 아그라왈(D.P.Agrawal)은 철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1,000년대 후반부, 갠지스-야무나강 사이 평원에서 회채색토기 사용하던 사람들에 의해서였지만, 철기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그 지역은 여전히 촌락 경제 상태에 놓여 있었을 뿐이고, 그들이 동진하여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북부흑색연마토기를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으니, 300개가 넘는 회채색토기 유적지가 보고된 걸로 보아, 촌락 수준을 넘어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 고고학 유물로 이 지역에서 제련한 철제 화살촉, 창촉, 낫, 못 등이 많이 출토된다고 주장한다.21) 이에, 짜끄라바르띠는 인도에서 철기 시작된 것은 회채색토기 시기에서가 아니고, 그 이전인 흑적토기(Black-and-Red Ware) 시기 에서인데, 말와르(Malwar)에서 기원전 1,800년에 사용되었는데, 이때 이미 철제 보습까지 사 용되었음이 고고학 조사로 보고되었으니 아그라왈이 주장하고, 샤르마가 따르는 철제 도구 기 술 혁신이 갠지스 평원에 도시 문명을 가져온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22) 꼬삼비, 샤르마, 아그라왈이 제기한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 다는 주장의 전제는 갠지스강 유역에 울창한 숲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에 대해 고 고학자 막칸 랄(Makkhan Lal)은 이 주장을 하나의 확인되지 않은 신화로 간주하면서 철기의 광범위한 사용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당시 거주지 간의 거리와 거주 인구 그리고 필요한 토 지 등을 고고학적 근거로 볼 때, 기원전 6세기경에 광범위한 철기 도구로 그 숲을 제거할 필 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23) 그런데, 막칸 랄은 힌두뜨와 색채가 강한 역사 교과서를 집필한 인도국민당 정부에서 인도 고대사를 집필한 역사학자로 이전의 샤르마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자의 역사학을 크게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샤르마는 1993년에 랄이 주장한 바와 같이 강가나 호숫가에 주거지를 형성하는 것은 철기 시대에도 분명히 존 재한 것과 별개로 갠지스 중류 유역에는 연강우량이 1,600mm에서 1,000mm 정도나 되고, 그로 인해 매우 울창한 삼림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충적토가 이 지역에서는 매우 강하여 철기를 통한 삼림 제거 없이는 농경이 불가했다고 주장했다.24) 샤르마는 아리야인이 1,000년 경에 도착한 갠지스강 상류 유역에서는 철기를 주로 목축이나 부족 간 전쟁용 무기로 사용했 으나, 중류 유역에 도달한 기원전 500년경에서야 대규모로 농경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문헌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용한 철제 농기구가 고고학적 유물로 대거 발굴 되지 않는 것은 그 지역은 몬순 때 많은 비가 와 습도가 높고, 충적토가 산성이 높아 쌀농사 에는 적합하지만, 유물을 쉽게 부식시켜서라고 주장한다

고고학자 띠와리(Rakesh Tewari)는 화분학(花粉學)과 식물학 연구

이러한 논쟁이 오간 후 최근 고고학자 띠와리(Rakesh Tewari)는 화분학(花粉學)과 식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야무나강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에 도시화 이전에 울창한 숲이 그 지역 에 존재했고, 철제 도구의 광범위한 사용이 그 지역을 개간하여 대규모 정착지를 형성시켰다 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곳곳에 울창한 숲이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풀이 많은 사바 나 초원에 가까우며, 그래서 농경의 발달은 철기의 도입 이전에 이미 갠지스 중류 유역에 확 산한 상태라고 주장한다.26) 그런데, 띠와리의 주장은 화분학이나 식물학이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는 방법론에 의한 것으로, 기존의 역사학과 고고학에 의한 연구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맥락 을 함께 검토하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고, 논문이 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역사학 맥락 밖에서 주장하는 소위 과학적 방법론의 유효성은 현재로서는 대체로 판단을 유보 한 상태다. 고고학이란 소설과 같은 창작 문학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나 과학적 정밀성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고고학 단독으로 뭔가를 말할 수는 없고, 그래서 역 사학적 맥락에서 추론해야 함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역사학이나 고고학의 연구 에서 널리 통용되는 방법론은 무시하고 전혀 검증되지 않은 어떤 방법론을 통해 자신들이 세 운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을 적용해 결과를 도출하고, 그것을 매우 폭넓게 적용하고 독자가 새로운 의미를 상상할 수 있도록 현혹하는 것은 사이비 고고학이다.27) 라자람, 프롤리 등이 사용한 천문학이라는 방법론 그리고 역사학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택한 띠와리의 화분학 방법론 또한 사이비 고고학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삼림의 존재와 그것을 제거하는 데 철기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와 관계없이, 기원전 500년경부터 본격화한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의 도시화 문명은 복합 사회를 가져왔다는 사 실은 학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베다 경전의 편찬이 끝나고 베 다 전통을 이어받은 새로운 경전 편찬이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힌두 고유의 신화로서 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이띠하사(itihasa, ‘그렇게 있었던 것’)의 발전이다. 이띠하사는 실재를 기록하는 대신 신화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라마야나》와 《마하바라따》 두 서사시가 바로 이 장르에 속하는데, 이 시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이 시기를 지나 기원후 5세기경까 지 걸쳐 편집되고, 여러 사람에 의해 구전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이띠히사보다 더 오랜기간에 더 방대하고 정밀하게 편찬된 뿌라나(Purana, 古談)에 의해 힌두 신화의 우주적 시간 개념이 완성된다. 그 신화에 의하면, 우주는 네 개의 유가(yuga 紀)로 나뉘어 순환한다. 완전 시대인 끄리따(Krita)기, 끄리따기로부터 조금 타락한 뜨레따(Treta)기, 그로부터 더 타락한 드 와빠라(Dvapara)기, 그리고 마지막 기인 완전히 타락한 말세 깔리(Kali)기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