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자에서 출토문헌으로

송대의 호고주의와 현대의 고고학 혹

은 비판적 고대사 인식 사이에는 또 다른 핵심 연결고 리가 존재한다. 바로 1899년 갑골문의 발견이 신기원을 연 고문자학이다. 후술할 중국 고고학 의 시작이 거의 전적으로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의존했다면, 고문자학은 중국 고유의 학문이 다. 전통적으로 고문자는 先秦 시대의 한자를 지칭했으나, 1970년대 이래로 선진 문자의 특성 을 간직한 전한(기원전 2세기경) 초기의 簡牘과 帛書가 대량 출토되어, 통일 이후의 秦과 전 한 초기의 문자까지 고문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27) 復旦大學의 劉釗가 적절하게 개관했듯이,28) 고문자 해독의 시작은 전한시대(2세기 BC) 공 자의 옛집 벽에서 나온 이른바 孔壁書의 “古文”으로 된 尙書를 孔安國(156-74 BC)이 당대 의 문자로 정리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슷한 시기 발견된 서주시대(1045-771 BC) 청동 기 명문에 대한 해독이 비교적 정확했다. 이후 후한시대의 許愼(대략 58-147)이 說文解字라 는 字典에서 선진시대 이래 사용하던 小篆 9353자를 표제자(重文으로 표현한 古文과 籀文 1163자도 아래에 열거)로 540개의 부수 체계와 “六書”의 이론으로 해설하여, 고문자 해독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송원대 鄭樵(1104-1152)의 六書略과 戴侗(1200-1285)의 六書故 등은 설문해자를 보완했다. 청대 금석학자인 吳大澂(1835-1902)의 說文古籀補에서 제시 된 고문자 해독은 현대 학자들에 필적할 정도고, 孫詒讓(1848-1908)의 古籀拾遺와 古籀餘 論은 ‘偏旁분석’ 방법을 제시하여, 고문자 해독에 질적인 도약을 가져왔다.29) 이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唐蘭(1901-1979)과 于省吾(1896-1984), 裘錫圭(1935~), 林澐(1939~) 등 현대 학자 들의 더욱 체계적인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프린스턴대학의 벤저민 엘먼(Benjamin Elman)은 갑골문이 서구 과학적 학문의 영향을 통해서가 아니라 王懿榮(1845-1900)이나 劉鶚(1857-1909) 같은 금석학에 조 예 있는 경학자들에 의해 최초에 인식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0)

1799년 로제타석의 발견 이 실마리

제공하기 전까지 오리무중이었던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과 달리, 이미 고문자에정통한 孫詒讓이 최초의 갑골문 저록인 유악의 鐵雲藏龜(1903)를 토대로 어렵지 않게 초기 갑골문 해독을 주도했다. 갑골학을 비롯한 중국의 고문자학은 19세기까지 이어져 온 금석학과 청대에 경전 연구의 방법으로 성장한 小學, 즉 문자학과 음운학 등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 학문의 강한 잔영으로 인해 20세기 초반까지 고문자학도 호고주의적 한계가 뚜렷했다. 18세기 고증학의 부흥으로 문헌과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두드러졌어도, 고증학자들은 엄연히 五經 등의 경전을 절대적 가치로 삼은 유학자로 “경전의 가르침이 훼손 되지 않는 세계를 꿈꾸었을 뿐이다.”31) “경전이 모두 역사”라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章學誠 (1738-1801)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여전히 상대적인 우발적 공간이기보다 인간 행위와 천명의 변함없는 도를 나타내는 도덕적, 정치적 교훈을 잘 보존한 보고였다.32) 이러한 상황에 서 금석학 자료를 통해 얻은 정보가 그 해당 시대의 사회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활용될 여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기물이나 탁본 수장가인 청대 금석학자나 소학에 치중한 고증학자 중 역사학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33)도 20세기 중국 고문자학의 새 로운 길을 예비한다. 그것은 바로 고문자 자료와 역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의 결합 혹은 융 합이다. 여기에는 왕조 중심 전통 역사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서양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수용 한 1902년 梁啓超의 “신사학” 제창 등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34) 상 후기(기원전 13~11세기)에 일상적으로 행해진 왕실의 점복을 기록한 갑골문 연구는 1899년 최초 발견 이후 1928년부터 1937년까지 그 발상지인 河南省 安陽市의 殷墟 발굴로 전기를 맞이한다. 이때 총 24,918편의 문자가 새겨진 갑골 편을 얻었고, 1973년 殷墟 小屯 南地와 1991년 殷墟 花園莊 東地를 비롯한 몇 차례 굵직한 발굴이 이어졌다.

1978년 당시까 지 다양한 저록

에 흩어져 있던 갑골문 탁본 41,956편을 모은 甲骨文合集(中華書局) 13책이 완간되었고, 1999년 출간된 甲骨文合集補編(語文出版社) 7책에는 13,450편이 수록되었다. 최초 발견 이후 100년 이상 여러 저록에 중복 수록되거나 누락된 것도 있어서 정확한 통계가 어렵지만, 20세기 말까지 글자가 새겨진 갑골 6만5천 片 정도가 公刊되었고, 2022년 출간된 甲骨文摹本大系 43冊에는 총 7만여 편이 수록되었다.35) 왕과 관련된 거의 모든 방면의 다 양한 점복—조상 제사와 날씨, 추수, 왕의 巡狩와 사냥, 전쟁, 농지 개척, 읍 건설, 출산, 질병 등—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 후기에 이미 상당히 발전한 기록 보존 체계 가 존재했음을 알게 해준다.36) 갑골문을 비롯한 중국 고문자 연구의 중요한 한 축은 여전히 說文解字 이래로 지속된 글 자 하나하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그러나 갑골문 연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20세기 중국 고대문명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그 첫 번째를 주도한 인물이 王國維(1877-1927)로, 기물 수집과 정리에 치중한 이전의 연구자들과 달리 최초로 분석적 연구를 추구한37) 그는 문 헌과 갑골문 등 고문자 자료를 대조하여 역사와 지리 및 예제 등을 연구했다.38) 그가 「古史新 證」(1925)에서 제창한 이른바 기존의 “紙上” 자료와 새로운 “地下” 자료의 상호 인증, 즉 전 래문헌과 명문을 비롯한 고고학 자료의 “이중증거법”은 오늘날에도 고대 중국 연구의 기본이 다. 두 번째는 1928년부터 은허의 발굴에 참여한 董作賓(1895-1963)이 「甲骨文斷代硏究例」 (1933)라는 논문에서 200여 년에 걸친 갑골문을 5기로 나눈 것이다. 현재까지도 갑골학의 핵 심 논쟁을 유발하는 동작빈의 분기는 고문자 자료를 역사 등 분야로 응용하는 토대가 되었 다.39) 갑골문과 달리 오랜 연구의 역사를 지닌 청동기 금문은 대부분 周代(기원전 11세기~3세기) 의 귀족들이 왕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戰功이나 관직 임명 등 업적과 함께, 제사와 혼 인, 가족사, 거래, 소송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기원전 9세기경 서주 후기의 관직 임명을 기념한 毛公鼎 명문은 500자에 이른다. 청대까지의 청동기와 금문 연구가 수집과 저록, 문자 해독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20세기 이후에는 갑골문 연구와 유사한 궤적을 보여준다. 청대에 이미 3천 점 이상의 청동기가 다양한 저록에 수록되어 있었고(각주 25), 1950년대 이후의 수집과 발굴로 많은 기물이 추가되어, 1994년 완간된 殷周金文集成(中華書局) 18책에는 총 12,113 편의 청동기 명문 탁본이 수록되었다. 2012년 2월까지 발견된 것들을 추가한 吳鎭烽(編著)의 商周靑銅器銘文曁圖像集成(上海古籍出版社, 2012) 35권에는 총 16,703점이 수록되어, 그 새로운 발견의 추이를 보여준다. 금문에 대한 현대적 연구는 郭沫若(1892-1978)이 주도했다.

이미 갑골문에 좋은 연구

를 남 긴 그는 兩周金文辭大系(1935)라는 저작에서 주로 기존의 저록에 수록된 주요 기물(서주 162점, 동주 161점)을 선별하여, 명문의 인명이나 서체, 텍스트 양식, 기물 장식 등을 토대로 정밀한 분기와 함께 금문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곽말약의 분기에 나타나는 많은 오류가 1950년대 陳夢家(1911-1966)에 의해 수정되었지만,40) 그가 세운 방법론은 후대 연구 의 확고한 토대가 되었고,41) 다음 절에서 논하듯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그의 역사 연구는 고 대 중국 연구의 새로운 방향 제시와 함께 교조주의적 왜곡을 초래하기도 했다. 왕국유와 곽말 약의 초기 연구가 망명지 일본에서 이루어졌듯이, 20세기 중후반까지 島邦男(1908-1977)이나 白川靜(1910-2006) 등 일본 학자들도 갑골문과 금문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갑골문과 금문이 주도하던 고문자 연구는 20세기 말 이래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 핵심 에 전국시대 초나라 지역에서 1950년대부터 산발적으로 출토되기 시작한 죽간 문헌인 楚簡이 자리한다.42) 초간은 1990년대까지 갑골문과 금문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지만43) 2010년대까지 새롭게 추가된 上海博物館과 淸華大學, 安徽大學 등의 소장 자료로 인해 고문자학을 넘어 서 학술사를 비롯한 고대 중국 연구 전반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44) 대체로 기원전 430년~250 년 사이의 자료인 초간은 대체로 文書(행정, 사법)와 卜筮禱祠記錄(점복, 제사), 遣冊(喪葬 의 례), 書籍類의 네 종류로 대별된다. 이들 중 사상과 역사, 문화, 방술 등을 담고 있는 서적류 문헌만 2022년까지 총 10만여 자, 161종이 정리되었다.45) 이들 문헌 중 일부는 전래문헌과 같은 계통이지만, 대부분 처음 알려진 것이다.46) 갑골문과 금문이 대체로 의례적 성격의 텍스 트라면, 초간 문서류 161종 각각은 한 권의 책으로 정보나 지식을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목적 성 문헌이다. 갑골문이나 금문 연구가 고문자 자체에 치중하며 전래문헌의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것을 넘어서, 초간 연구는 1970년대 馬王堆 漢墓 출토 帛書 周易과 老子 등이 촉발한 중국 고대 사상과 역사 “다시쓰기”를 가속화하고 있다.47) 이와 함께 2000년대 이래 “출토문헌”이라는 용어가 “고문자”를 대체하는 경향이 뚜렷하듯,48) 연구의 중심도 문헌학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동과 그리스 등 세계 고대 문헌 발전의 흐름—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초창기 문헌에 나타난 “의례적 일관성”에서 기원전 10세기 전후 다양한 문헌 장르가 나타난 “전통의 물줄기”(stream of tradition) 단계를 거쳐 이스라엘의 성경과 그리스 고전의 “경전 화” 같은 마감 단계에서 “문헌적 일관성”으로 전이49)—에서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변이가 두드러지지 않은 갑골문과 금문이 “의례적 일관성”의 단계에 해당한다면, 초간 은 다양한 문헌의 봇물이 터진 “전통의 물줄기”에 해당한다. 초간 단계에서 이른바 오경의 원 류가 대체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한대에 이르러 오경 중심의 경전화가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50) 여느 지역 못지않게 풍부한 전래문헌과 다양한 방식의 교차 검토가 가능한 중국 의 출토문헌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문헌학과 학술사 이해에도 귀중한 자료를 추가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