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문명1)과 갠지스문명2)의 정체에 관한 논쟁

머리말

인더스문명’은 소위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주요 문명 가운데 유일하게 지상에서 사라진 후 우연히 발굴된 문명이다. 그에 대한 기록도 없고, 출토된 인장에 새겨진 소위 ‘인더스 문 자’도 아직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그 기원에서부터 쇠퇴 및 소멸까지의 거의 모든 정 체 파악과 성격 규정에 대해 여러 주장이 난립한다. 본격적인 논쟁은 1977년, 인도에서 처음 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시작된다. 네루(Jawaharlal Nehru)부 터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정권을 선거에서 물리치고, 정권을 잡은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파키스탄 영토 안에 위치하는 인더스문명 이전에 인도 영토 안에 위치하는 ‘메말라 사라져 버린 사라스와띠(Saraswati)강’이 그 문명의 발상지라는 주장을 폈 다. 1921년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이후 1930년대에 들어와 이 문명이 세계 최고의 청동 기 문명이면서 세계 고대 문명의 요람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리야 사마즈 (Arya Samaj)를 중심으로 한 힌두 민족주의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힌두 민족주 의의 근간인 베다가 형성된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 유목 문화의 시기인데 새롭게 발굴된 모 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랍빠를 중심으로 하는 인더스문명이 그보다 더 이전 시기의 문 명이면서도 더 진보한 청동기 도시 문명이기 때문에, 당시까지 최고(最古)의 문명이라고 규정 된 베다 시대의 독보적 위치가 흔들리고, 혼란스럽게 된다. 1980년대부터 베다의 주인공인 아 리야인들은 외부에서 인도아대륙으로 침입 혹은 이주해 들어 온 것이라는, 종래의 학설을 뒤 집고, 인도아대륙에서 외부로 나갔다가, 다시 내부 즉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인도 토착민이라는 주장이 전개된다. 아리야인이 어디에서 어디론가 이동했다는 기록만 있지, 그 장 소가 구체적으로 적시된 기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이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의 근간이다

인더스-갠지스 문명의 정체 관련 논쟁

인더스문명이 베다 시대의 아리야 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자’(revisionist)라고 부르지 만, 사람마다 그 내용과 책정한 연대가 다르다. 윗첼(Michael Witzel)은 이 수정주의자들을 크 게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 인도-아리야인의 기원을 인도 뻔잡으로 두는 토착주의자로 그 뿌리 가 영국 식민 지배기의 민족주의자인 스리 오로비도(Sri Aurobindo)와 다야난다 사라스와띠 (Dayananda Saraswati)에 두는 파, 둘째, 아리야인이 인도로부터 아대륙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그리하여 이란인 심지어는 인도-유럽어인도 인도에서 이주해나갔다는 파, 셋째, 세계의 모든 언어가 산스끄리뜨에서 파생되었으니 세계 고대의 모든 문명이 북부 인도에서 기원해나 갔다고 믿는 파로 그 연대가 기원전 10,000년부터 기원전 6,000년경 사이라고 주장하는 파인 데, 이 가운데 둘째 파가 가장 대중적이라고 정리한다.4) 그들의 주장은 모두 다 고고학적, 언 어학적, 역사학적 근거는 전혀 없는, 순수한 가설이다. 그 가설은 대체로 기원전 6,000년, 혹 은 심지어는 기원전 10,0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까지를 베다 문명 즉 갠지스문명이라고 규정하고, 그 후 기원전 1,900년경까지를 갠지스문명 안에 속한 사라스와띠-인더스문명 시기 로 정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주장은 인도에서 아리야인이 서아시아와 유럽과 중앙아시아로 나갔다는 즉 인더스문명의 주인공은 아리야인이 고 그들의 고향은 인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이 글은 이러한 힌두 민족주의가 결국, 힌두뜨와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아리야인 인더스문명 기원론의 내용과 그 논쟁의 양상을 살펴보고, 나아가 기원전 500년 경 갠지스 중류 유역에서 발생한 철기 도시 문명의 정체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이후 만들어진 힌두교 기원 신화와 연결되면서 벌어진 역사의 신화화에 둘러싼 논쟁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인더스문명이 아리 야인이 건설한 것이라는 사이비(pseudo) 역사학의 연장선에서 갠지스 중상류 유역에서 일어 난 2차 도시화의 기간에 형성되기 시작한 힌두 신화 즉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없는 힌두교 의 우주 기원 신화를 인더스문명의 시원과 연계하여 그 문명을 갠지스문명의 시원으로 설정하 는 사이비 역사학의 허구를 논박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힌두뜨와에 입각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엄밀히 말할 때 학문적 연구라 할 수 없는 사이비 역사학과 고고학에 의한 결과이지 만, 그 폐해가 날로 심각하여 학문적으로 그 진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힌두뜨와 기반 사이비 역사학의 인더스문명 왜곡

인더스문명의 유적은 1848~9년 영국이 시크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을 합병한
후 물딴(Multan)과 라호르(Lahore) 사이 철도를 건설하는 도중 하랍빠 지역에서 지하에 묻힌
많은 벽돌이 인부들에 의해 대거 꺼내져 갱도 건설에 사용되면서 드러났다. 초대 인도고고조
사국(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국장인 커닝햄(Alexander Cunningham)이 불교 유
적과 관련한 것으로 여기고 조사하는 도중 우연히 발굴한 이곳의 인장을 이 지역 것이 아닌
외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파악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이 지역에
고대 청동기 문명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는 못했다. 1924년에 존 마샬(JohnMarshall)이 하랍빠 지역을 불교보다 더 오래된 유적이라고, 고고학자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발굴한 미케네 문명 같은 잃어버린 문명이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굴되었다고 런던에서 발표하고 이후 더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하랍빠에서와는 달리 전혀 훼손되지 않은 모헨조다로에 고대 청동기 문명이 묻혀 있는 것으로, 처음으로 파악하였 고, 이에 식민 치하의 민족운동에 심취한 인도인들은 이 주장에 열광했다. 1944년에 인도고고 학조사국장으로 임명된 모티머 윌러(Mortimer Wheeler)는 분단 이후 이 고대 문명을 인도 문명이 아닌 인도와 파키스탄의 문명이라고 기술함으로써 고대 청동기 문명이 분단된 두 국가 사이의 역사 분쟁의 불씨로 작동할 여지를 남겼다. 1947년 분단 이후 인도고고학조사국은 파 키스탄으로 넘어간 대부분의 유적지를 조사할 수 없게 되자, 인더스강 지류이면서, 인도 영토 안에 있는 말라버린 가가르-하끄라(Ghaggar-Hakra)강 흔적을 따라 발굴 조사했는데, 파키스 탄의 상대적인 무관심한 태도와는 달리 인도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열성을 보였다. 이는 두 나라 모두 이 문명이 힌두 문화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발굴된 유적을 기준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 이 문명이 청동기 도시 문명이라는 사실에 대 해서는 인도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는 이견이 없다. 발굴 유적의 규모로 볼 때, 소위 4대 문명의 요람이라고 말하는 지역 가운데 그 영역이 가장 넓고, 발굴 유적지 가운데 도시라고 규정할 수 있는 곳은 하랍빠, 모헨조다로, 라키가르히(Rakhigarhi), 가네리왈라(Ganeriwala) 그리고 돌라위라(Dholavira)의 다섯이 있다. 도시는 계획에 따라 구운 벽돌을 사용해 건축물 을 세웠고, 정교한 배수와 하수 체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했지만, 피라미드나 지구라트 같은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통해 제국을 유지할만한 정치권 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각 지역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역이 발달했으며, 후대 힌두교의 뿌 리가 되는 종교의 여러 모습의 기원이 이곳에서 시작한다는 정도의 내용을 논증할 뿐이다. 발굴된 유적이 고대 청동기 문명에 속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인도에서는 사와르까르 (Vinayak Damodar Sawarkar)가 저항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힌두뜨와 개념 안에서 인도를 힌두의 나라로 규정하고, 인도를 힌두교를 기반으로 힌디를 모국어로 하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 힌두교 신화의 모태가 되는 베다를 만든 아리야인이 인더스문명을 건설했 고,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인더스문명의 몰락 이후 아리야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아프 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식민주의자가 만든 허구라고 주장했 다. 그들은 인도아대륙에 침입해 들어온 것은 오로지 후대의 이슬람과 영국 세력뿐이고, 그래 서 그 이민족들은 모두 그 땅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식민 통치자인 영국에 저항하기 위해 힌두교를 근간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인위적으로 만들다 보니, 힌두가 아닌 무슬림이나 기독교인을 배제해야 하는 배타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인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더스문명을 건설한 사람은 외래 침략 혹은 이주민인 아리야인이 아니고 토착민 아리야인이 건설한 것이 되어야 했다.

힌두뜨와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역사 왜곡

.처음 제기된 1930년대 이래 그들이 처 음으로 정권을 잡는 1977년까지 국민에게 거의 지지받지 못하고,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였다. 1977년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단(Jana Sangh. 현재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haratya Janata Party의 전신)이 중심이 된 정권이 성립된 후 이전의 네루(Jawaharlal Nehru)와 인디 라 간디(Indira Gandhi)의 사회주의 성향의 정권 시기에 역사학을 주도해 온 온 마르크스주 의 역사학 비판이 기존의 식민주의 역사 비판에 덧붙여지면서 본격화하였다. 이후 10여 년만 인 1990년대에 들어와 네루 중심의 인도국민회의 정권의 일당 지배 현상이 40년 만에 무너지 고, 힌두 민족주의의 인도국민당이 양대 정당의 하나로 등장하고, 국민의 지지를 많이 얻으면서, 그 힌두 민족주의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다시 집필하고, 그 이후 좀 더 구체적인 역사 전 쟁 양상으로 비화하였다. 인더스문명이 언제인지 불분명한 시기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발 굴된 후 문명에 관한 기록도 없고, 그 문자마저 해독되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아직 그 정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서 심각한 왜곡이 가능해진 것이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민족 찬양은 1930년대 인더스문명이 밝혀지기 전에는 단순한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힌두 신화를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 차원이었으나, 갑자기 인더스문명이 세계 최고 문명으로 발굴된 후 그 신화를 실제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인더스문명과 통째로 연결하려는 시도가 벌어진 것 이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데에는 반(反)파키스탄이라는 정치 문제가 크게 작동하였 다. 파키스탄 편에 선 모티머 윌러는 인더스문명의 기원을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 문명의 영향에 두고5), 아리야인의 침입으로 몰락했다고 주장하여6), 힌두 민족주의 진영이 크게 반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