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원인에 대한 논쟁 또한 정치적 맥락

이에 관해 학계 논쟁은 문명의 도시들이 갑자기 사라진 여부, 몰락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 아리야인 침 입과 관련되는지 여부, 《리그베다》에 나오는 신화 속에 나오는 종족들 간의 싸움과의 관련 여 부, 홍수나 지진 혹은 사막의 확장과 같은 기후 변화와 관련 여부 등과 관련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오면서, 문명의 몰락은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은 아니고 기후 변화 등 여러 요소가 연쇄적으로 생기면서 나타나, 문명이 몰락한 후에도 후기 인더스문명의 주인공들은 문명권 바깥으로 이동했고 그로 인해 문화의 단절은 이루어지 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현재까지의 대체적인 중론이다.7) 문명의 몰락은 적어도 윌러가 주장하 는 아리야인의 침입에 의하지는 않았다는 것에는 거의 의견 일치를 본 상태다. 그런데, 몰락 원인 가운데 가장 주된 요소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기후 변화 원인 주장은 대부분 학자가 받 아들인다

기후와 지형의 변화는 문명 쇠퇴

이후 이주해 들어온 아리야인이 남긴 《리그베다》에 나타나는 강이 말라 사라져버리는 모습과 연계되면서 논쟁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힌두 민족 주의자들은 《리그베다》의 강이 메말라 사라져버린 사건을 사라진 문명의 원천 개념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리야인이 메말라 사라진 사라스와띠강에서 인더스문명의 원형을 건설하였는데, 지금은 강이 사라져버려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사라스와띠 강이 마르 게 된 기원전 1900년경 이전에 아리야인이 이미 이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인 도아대륙으로 들어가 베다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8) 그런데 《리그베다》에 나오 는 사라스와띠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서북부 어딘가에서 실제 존재한 강일 것으로 추측만 할 뿐, 그 정확한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사라스와띠 강의 정확한 위 치를 찾을 수 없는 학문적 상황에서,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강이 메말라 사라져버린 일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인더스강 남쪽에 위치하고 영토상으로 볼 때 지금의 인도 영토 안에 속한 가가르-하끄라 강이다.

고고학자 굽따는

1995년에 인더스문명은 지금까지 알 려진 바와 같이 파키스탄에 속한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고, 인도에 속하는 지금의 가가르-하끄라강 상류 유역의 메말라 사라져 버린 강과 여러 인더스강 지류 유역에서 발생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9) 이후 프롤리(David Frawley)와 라자람(Navaratna S. Rajaram)은 이 지역이 사막의 확장으로 인해 황폐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기후 변화가 시작되면서 아리야 인들이 이 지역에서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그리고 인도아대륙 안 갠지스강 방향으로 이주하 였다고 주장한다.10) 이렇게 실체가 불분명한 ‘사라스와띠’를 인더스문명의 시원으로 주장하는 것은 현재 인더스강이 파키스탄 안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후 변화가 심한 지역에 서 어떤 강이 인더스강 지류로 존재했다가, 언젠가 메말라 사라져버렸고, 그 위치가 현재 인 도 영토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메말라 사라져버린 가가르-하끄 라강을 《리그베다》에 나오는 그 사라스와띠로 비정하고, 이러한 ‘잃어버린 사라스와띠’ 문명 기원론에 대해 생태과학자들의 주장까지 반론이 줄을 잇고, 그에 대해 재반론이 또 이어지는 중이다.

과학자들 간의 논쟁이 벌어지는 사실

과 관계없이 역사학적으로는 분명히 묻고 답해야 하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논증의 문제가 분명히 있다. 설사 《리그베다》에 나오는 사라스와띠의 위 치를 지금의 가가르-하끄라강이라고 비정할지라도,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답을 해야 하는 문 제들이 있다. 왜 이 문명의 핵심 지역이라고 하는 그 가가르-하끄라/사라스와띠 유역에서는 인더스 유역의 모헨조다로나 하랍빠 같은 규모의 도시가 세워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파키스탄 인더스 유역보다 인도 내 가가르-하끄라 유역의 발굴지가 훨씬 많긴 하지만, 그것은 두 나라 정부가 발굴 작업에 얼마나 더 열의를 보였는지에 따라 판단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고고학자 라뜨나가르(Shereen Ratnagar)가 주장하였듯, 이 지역의 유적지는 모두 촌락 수준 의 주거지이고 단지 모헨조다로-하랍빠와 접촉을 해왔을 뿐이라고12) 하는 주장에 대한 역사 논리적 응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가가르-하끄라/사라스와띠가 인더스보다 문명의 시원으로 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설사 앞으로 가가르-하끄라 강 유역에 몇몇 유적이 발굴된다고 하여도 그것을 인더스문명의 시원이라고 규 정할 논리적 근거는 없으며, 그것은 단순히 인더스문명의 유적지 분포가 확장된 것일 뿐, 사 라스와띠 강이 인더스문명과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독자 문명이라 해석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불어, 인더스문명의 핵심

은 도시 문명이라는 점은 진영 논리와 관계없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데, 아리야인이 이주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토착민이며 그들이 인더스문명을 건설한 주 체라면, 왜 그 도시 문명을 건설한 아리야인이 갠지스-야무나강 사이의 인도 북부 평원으로 이주해 농경을 정착하고, 그 위에서 도시를 건설하지 못한 채 1,000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갠 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도시 문명을 건설했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해야 한다. 인더스문명이 성 숙기로 접어들면서 그 주인공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를 대규모로 건설하였고, 도시와 촌락 간에 육로로 그리고 때로는 강을 통한 수로로 교역하였고, 모헨조다로와 같은 도시 유적 에서는 강 가까이에 큰 규모의 곡물창고를 사용하였다. 전체적으로 1,000개 이상의 정착지가주로 인더스강과 가가르-하끄라 강을 포함한 그 지류 유역에서 발굴되었다. 인더스문명의 도 시는 여러 특징이 있지만, 격자로 이루어진 도시 계획과 하수구 시설이 잘 정비된 도시라는 성격이 다른 문명과 비교할 때 매우 두드러진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토된 하랍빠 문화 의 수많은 인장을 통해서도 양쪽의 교역은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들이 이주한 곳에서 1,000년 동안 이러한 특징들과 관련된 그 어떤 것을 갖춘 도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도시와 촌락의 각 공동체는 도자기, 장신구, 인장, 무게를 다는 추 등에 서 표준화를 이루어냈고 그 위에서 물질 문화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서 교역이 발달했 다. 그런데 그러한 교역 네트워크와 하랍빠 문화 또한 이후의 인더스문명의 주인공이 그곳으 로 이동하여 건설했다는 후기 베다 시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시기 어떤 문헌에서도 교역이나 상업을 지시하거나 최소 유추할 수 있는 그 어떤 표현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질문 외에도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기초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인더스문명의 주인공이 아리야인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 베다 시대의 아 리야인들은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을 거쳐 뻔잡(Punjab) 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지금의 웃따르 뿌라데쉬(Uttar Pradesh) 서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부터 정착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 들이 남긴 회채색토기(Painted Gray Ware)나 갠지스강 중류 유역에서 제2의 도시 문명을 이 루면서 남긴 북부흑색연마토기(Northern Black Polished Ware)가 왜 인더스문명 유적지에서 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인지, 답해야 한다. 그 둘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 문명이라면, 이러 한 고고학적 유물의 부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인더스 시대와 베다 시대가 동일한 주 인공에 의해 건설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 소위 말하는 인더스 문자를 들 수도 있다. 400개에서 600개에 이르는 여러 상징이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여러 모양의 인장에서 발견되 었다. 대부분의 명문(銘文)은 그것이 문자이든 기호이든, 그 수가 너무 적어 언어로서 해독이 현재로서는 불가한 상태지만, 그것들이 하랍빠 권역을 넘어 메소포타미아에서까지 다수 발굴 될 정도인데, 리그베다 시대는 물론 후기 베다 시대에도 그 어떤 것도, 발굴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말(馬)의 존재 또한 이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베다 시대 사람들 즉 그들 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인도에서 인더스문명을 건설한 직후 그곳에서 갠지스-야무나 평원 쪽으 로 이주해 온 아리야인들이 존재했다더라도, 그들은 《리그베다》에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히 언급되었다시피, 말을 널리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말의 흔적을 인더스문명 유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13) 이러한 역사학-고고학적 맥락에서 나오는 여러 의문 제기에 어떤 유효한 답을 하지 못한다면, 인더스문명을 토착민 아리야인이, 지금의 인도 땅에서 건설하고, 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해갔다가 다시 인도 땅으로 들어왔다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은 더는 학문의 유효한 논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