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영의 층위 구분을 토대로 尹達(1906-1983)이 또 다른 돌파구를

그 는 1937년 완성한 논문에서 안데르손이 앙소문화로 분류한 유물 중 시대가 더 늦은 용산문화 유물이 뒤섞여 있었을 수 있다고 보고, 특히 앙소촌 인근에서 발굴되어 앙소문화로 분류된 不 召寨 유적은 그 유물 특징으로 볼 때 확실히 용산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논증 했다. 나아가 이 사례를 안데르손이 발굴하여 앙소 시기보다 앞선 문화로 추정한 감숙성 齊家 坪의 유물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94) 이를 이어받은 夏鼐(1910-1985)가 1945년 제 가평 인근의 제가문화 유적인 寧定 陽洼灣 묘를 직접 발굴했다. 특히 묘에서 출토된 앙소 채 도 편들을 토대로 앙소문화의 지층이 명백히 제가문화 아래층에 중첩되어 있었음을 입증하여 제가문화가 앙소문화보다 빠를 수 없음을 밝혔다.95) 안데르손의 齊家坪 편년을 반증함으로써 서방전래설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흔들 수 있게 된 것이다.96) 1957년 감숙성 臨洮에서 마가요 문화 지층이 앙소문화보다 상층에, 渭源縣 寺坪 유적에서는 마가요문화가 제가문화의 아래층 에 위치함을 확인했다.97) 안데르손이 감숙앙소문화라고 명명한 마가요문화가 중원의 앙소문화 보다 늦은 제가문화의 전신임을 밝혀낸 것이다

안데르손 역시 1940년대 들어

자신의 서방기원설을 재고했다. 여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중 국에서의 새로운 발견과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독일 등에서 비롯된 지나친 유럽 중심주의 이 외에도, 앞에서 언급한 1921년 앙소촌에서 발견한 곡물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29년 스웨덴 의 식물학자들이 그것을 남방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큰 벼의 껍질로 밝혀냄으로써, 앙소문화 의 농업이 근동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서방기원설의 근거로 삼았던 안데르손은 자신 의 논리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앙소의 채도 문양이 중국을 통해 서방에 전래되었을 가능성까지 제시하면서도, 청동기 같은 금속 기술의 수입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놓 았다. 다만 그러한 문화적 자극이 어디서 처음으로 일어났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어떻게 도입 되었을지 논하기는 시기상조라고 보았다.98) 1949년부터 1970년대까지 중국의 학술이 정치성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듯이, 윤달이나 하내 의 연구 같은 분석적 주장은 나올 수 없었고, 안데르손 역시 식민주의자나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매도당했다. 1985년에야 하남성 澠池에서 열린 앙소문화 발견 65주년 학회에서 북경대 학의 嚴文明이 그동안 쌓인 앙소문화가 동에서 서로 발전해 간 증거를 제시하며 안데르손의 오류를 지적했다. 다만 안데르손이 당시까지의 증거를 통해 서방기원설을 제시한 것은 객관적 이었음을 인정하여 중국 고고학의 초창기에 끼친 그의 지대한 영향을 강조했다.99) 1997년 안 데르손의 이론에 대한 전면적 재분석이 이루어졌고,100) 2001년 앙소문화 발견 80주년 기념 학회에서 안데르손은 다시 학자로 복귀한다.101) 나아가 그가 1940년대 자신의 설을 수정하면 서도 고수한 금속 기술의 수입 가능성은 2000년대 이후 중국 학계에서도 유라시아 초원 지역 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있다.102) 지금까지 살펴본 안데르손과 그의 유산에 대한 중국 학계의 반응이 중국 고고학 발전의 축 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면,103) 그것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서양의 지역주의에서 중국 자 체 학문의 성장으로 촉진된 중국의 지역주의로 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중국의 영토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이 지역주의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듯 또 다른 지역주의를 낳는다. 중국 문명을 둘러싼 서양 대 중국의 지역주의 역시 다른 양상으로 지속되고 있다.

구계유형론과 지역주의의 진화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앙소문화에 대한 안데르손의 인식을 훨씬 넘어서 그 문화가 기원전 5000~3000년 사이 섬서성과 하남성, 산서성을 중심으로 분포하여 감숙성과 청해성, 호북성, 하북성, 내몽고 등 주변 지역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고 있다.104) 북경대학의 소병기 는 1960년대까지 앙소문화 도기의 유형학에 천착하며 그 문화권 내에서 半坡類型이나 廟底溝 類型 등 다른 계통이 뚜렷함을 간파하고, 그 양상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 했다. 1949년 이래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고고학 문화들과 함께, 특히 1972년부터 考古에 발표되기 시작한 지역 문화들의 C-14 절대연대 수치가 중원 못지않게 이른 점105)이 큰 영향 을 미쳤다. 20세기 후반 중국 고고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1981년 발표 논문에서 소병기는 역시 주로 도기 유형학에 근거하여 당시 중국 영토 내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을 다음의 6개 區 系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106) ① 섬서성, 하남성, 산서성 지구(중원), ② 산동성과 그 인근 지구(동방), ③ 호북성과 그 인근 지구, ④ 장강 하류 지구(동남), ⑤ 鄱陽湖와 珠江 삼각주 일 대를 중축으로 하는 남방지구, ⑥ 만리장서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지구. 자신의 연구를 총망라한 中國文明起源新探(2009년)에서는 ⑥의 북방을 맨 앞에 위치시키고, ③에 사천 분 지를 추가하여 서남부로 명명했다.107)

상호영향권(interaction sphere)

기존의 황하 유역 중심설을 뒤흔든 이 이론에서 소병기는 문명 시기에 황하 유역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다른 지구의 고고 문화도 각자의 특점과 경로를 따라 발전하며 중원과 상 호적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장광즈 역시 1986년 중국 고고학제4판에서 기원 전 7000년 이래 다수 지역의 신석기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는 이른바 중 국 문명의 “상호영향권(interaction sphere)” 이론을 제시했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다양한 지역의 신석기 문화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고, 용산문화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제4천년기까 지 다섯 지역108)의 신석기 문화들이 각각 사회문화적으로 복합화, 계층화되어 문명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이들 지역 사이의 상호작용 역시 강화되어 최초의 역사적 중국 문 명을 향한 지리적 장인 상호영향권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109) 1999년 출간된 케임브리지 중국고대사에서는 이때부터 “중국”이라고 지칭되기에 부족함 없는 역사의 단계로 접어들었음 을 추가한다.

장광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진시대의 문헌들이 용산문화기에 해당하는 상고시대의 윤곽 에 대해 대체로 일관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삼황오제 등의 전설에 나오는 영웅과 성왕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용산문화에 해당하는 지역 문명들의 발전기에 부합하여, 고 고학적으로 확인된 용산문화기의 무수한 성읍(萬國) 중에서 하상주 삼대의 선조가 나왔을 것 으로 보았다.111) 1977년 출간된 중국 고고학 제3판에서 전래문헌에 언급된 상 이전의 전설 과 고고학 자료의 결합에 유보적이었던 것112)과는 상당히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1981 년 논문에서 각 지역의 고고 문화를 문헌상의 족속과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시기상조로 여겼던 소병기113) 역시 2009년 출간된 책에서는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결합에 적극적이다. 중국 최 초의 문명 발상지로 홍산문화 등 북방을 중시하는 그는 黃帝로 대표되는 五帝시대의 전반부 를 북방이 주도했고, 요순우로 대표되는 후반은 홍수나 치수 전설과 함께 중원과 양자강 유역 에서 중화민족 조상의 결합과 재결합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상주 삼대를 거치며 夷와 夏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진한제국의 성립을 통해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이 마침내 형성되었다는 것 이다.114) 20세기 후반 중국과 구미의 중국 고고학계를 각각 대표하는 두 석학의 주장은 세부 내용에 서 차이가 있으나 다양한 지역의 고고학 성과에 기반한 신석기 문화의 다원성을 전래문헌에나타나는 통일적 역사관에 꿰맞추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 중국 영토 내 의 신석기 고고 자료로 표출되는 “원심성”과 전통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중원 중심의 “구심 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최소한 기원전 3000년이나 그 이상까지 소급하여 상정한 “중국”이 라는 하나의 그릇에 다 담으려는 것으로,115) 두 가지 측면의 상호 모순적 연구를 양산한다. 그 첫 번째는 중국 내부의 다양한 지역 지상주의 형태로 나타난다.116) 이는 구계유형론이 태동한 시기의 정치적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다. 1970년대 말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중 앙의 정치적 통제 약화는 고고학 분야에도 지방 분권화를 가져왔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省을 단위로 한 지역의 문물고고 연구소들이 독자적 기관 체제를 구축하고 해당 지역의 발굴 등 모든 결정권을 독점했다. 중앙도 지역의 허가 없이 발굴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구계유형론이나 상호영향권 같은 지역성이 전제된 이론이 지역화 체제에 적절하게 호응했음은 물론이다. 지역의 고고학 저널들이 인근 지역과 자신들을 구분하며 각 지역 특유의 문화적 배 열에 집중한 탓에 행정구역에 따른 관할지 이외의 자료는 배제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지역 내 의 단선적 문화 체제 구축에 치중한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예컨대 江蘇省 북쪽의 靑蓮崗文化 와 山東省의 大汶口文化는 실상 차이가 없음에도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지적 한다.117) 사천성의 청동기시대 유적인 삼성퇴 역시 “중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 왕조의 주 변 고고학”이라는 중국을 한 단위로 보는 구심적 경향의 이해에도 불구하고(각주 65 참조), 청동기의 양식적 차이를 통한 지역화를 강조하는 상반된 경향도 뚜렷하다. 기원전 1200년경의 삼성퇴 유적을 문헌 기록상 기원전 700년 이후에 태동한 정치체인 蜀과 일치시키려 하듯이, 산동=동이, 山西=晉, 호북=楚,118) 강소=吳, 浙江=越, 福建=閩, 사천=巴蜀, 雲南=滇 등의 도식 처럼 역사시대의 특정 종족이나 국가 명칭을 선사시대까지도 시대착오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렇듯 각 지역이 주체가 된 원심적 현상은 황하문명에 버금가는 “장강문명”이나 홍산문화 초기 문명론에서 비롯된 “요하문명” 등 광역권 문명론까지 설정하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국 내 학계에서도 이미 적절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장강문명의 경우 김병준이 그 지속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이외에 장강 상중하류 전체에 걸친 문화적 공유의 부재, 황하문명과 구분되는 특 징 못지않은 상호 교류와 접촉을 통한 변용 등을 들어 그 타당성을 반증한 바 있다.119) 김정 열은 소병기가 黃帝까지 끌어들여 중국 초기 문명으로 파악한 홍산문화 역시 그 대표적인 牛 河粱 유적 등에서 문명이나 국가의 요소를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대 이후에나 인격화되 기 시작한 신화적 황제를 이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본다.120) 장광즈가 홍산문화 등 동북 지역을 주목하면서도 이를 “중국”의 원형에 포함시키지 않은 점(각주 108)도 소병기에서 비롯된 요하문명론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계유형론과 상호영향권 이론은 그 원심력으로 인해 야기되는 지나친 지 역주의 경향 연구 문제뿐만 아니라 컬럼비아대학의 리펑이 2013년 출간된 책에서 지적한 대 로121) 왜 중원에서만 초기 국가가 출현하여 지속적으로 번성했는지와 같은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설명에도 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20세기 말부터 새롭게 나타나는 지역주의의 두 번 째 연구 경향은 리펑의 말을 빌리면 “(그) 족쇄를 풀려는” 노력이고, 이 역시 새로운 고고학 발굴에 의존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石峁 유적에 대한 중국 학계의 2018년 연구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저자들은 석묘의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분석하여 중국 최초의 국가가 북/중 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교환 네트워크의 교접점인 황토고원에서 출현하여 결국 중원의 삼대 문명 혹은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주장한다.122) 그 저자 중 한 명인 UCLA의 중국계 고고학자 리민은 같은 해에 출간된 저서에서 중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상주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고고학 자료를 망라하여 전설로 치부되던 문헌 기록과 함께 중국 하상주 삼대로 알려진 고대국가의 형성을 사회적 기억의 측면에서 재검토했 다.123) 리펑의 기대에 부응하듯, 그 책의 목표 중에 어떻게 신석기시대의 다수 지역 발전 세 계로부터 중원이 현저하게 부상하게 되었을지 및 고고학적 패러다임과 문헌 위주의 역사학적 패러다임 사이의 틈 채우기가 명시되어 있다.

리민이 제시한 중원의 하상주 삼대 전통

이 창출된 시나리오는 소병기나 장광즈의 틀을 계승 하면서도 지난 20여년 간 추가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그 내재적 발전의 연계성을 강화한다. 그 핵심 요지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제3천년기 전반까지 산동성의 大汶口와 양자강 하류의 良渚, 중류의 石家河 등 연안의 저지대가 정치 사회적 발전의 중심이었다. 특히 양저문화의 경우 그 夯土 기단이 제국시대 이전 중국의 가장 큰 단일 건축일 정도로 그 규모와 복합성 면에서 당시 다른 지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양저의 의례 및 정치적 중심으로서 역할이 나 옥기와 三足鼎 등 기술 혁신이 중원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수운이나 수로 같은 이질적 특 징으로 인해 중원의 삼대 전통에서 역사적 기억으로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3장 중원 이전: 신석기 발전의 정점). 이리두와의 격차가 5세기에 달하는 양저 등 양자강 중하류 문화의 소멸과 함께, 이리두와 시기적,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산서성 서남부의 陶寺문화와 황토고원의 석묘 등 고지대 용산 사회가 이리두에서 비롯된 삼대의 의례 전통에 기반을 제공했다. 예컨대 도사의 석기와 칠기, 도기 조합이 삼대에 청동기로 대체되었고, 특히 도사에서 처음 출현한 종과 石磬 등 악기 역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2100-2000년쯤 도사 중기 유적 의 묘지나 궁전구 등에서 파괴와 훼손 흔적과 함께 새로운 인구 유입 증거가 나타나고, 석묘 와 도사 사이의 고고학적 연계가 뚜렷한 만큼, 황토고원의 석묘인들이 도사를 멸망시켰을 것 으로 본다.125) 나아가 그 거대한 규모와 함께 독특한 玉璋을 비롯한 무수한 옥기의 사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