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고의 확산과 “走出疑古”의 반격

인간의 의심하는 능력은 창조적 발견의 원동

력이다. 그런데 역사학에서 고대의 문헌에 언급 된 과거나 그 문헌 자체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은 상당히 후대에 나타난다. 고대 문헌에 선험 적으로 부여된 종교적, 경전적 권위에서 탈피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경우 이러한 최초의 비판적 학자로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를 꼽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년 재위)가 로마 카톨릭교회에 서로마 제국을 바친 증거로 활용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Donation of Constantine)이 8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논증했 다.132) 1440년에 완성된 발라의 문헌학적 연구는 교회의 반발 때문에 그가 죽은 뒤 60년 이 후(1517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그의 학문 역시 몇 세대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받았다. 동 아시아도 다르지 않다. 王充(27-96?)과 劉知幾(661-721), 富永仲基(1745-1746), 崔述(1740-1816) 등을 거치며 고대 문헌에 대한 의심이 이론화되기 시작했지만, 19세기까지 주류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서야 白鳥庫吉(1865-1942)이 이른바 “堯舜禹 말살론”이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성왕과 경전의 우상 파괴를 시도하고, 顧頡剛(1893-1980)이 선배들의 주장을 더욱 정치한 “疑古” 이론으로 정립함으로써, 그 의심이 주도적 지위를 획득 한다.133) 그렇지만 1909년 일본 東洋學會에서 요순우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며 충격을 안긴 白鳥庫 吉의 강연134)은 지금도 이어지는 의고·信古 논쟁의 서막일 뿐이었다. 당시 일본 유학계를 대 표한 林泰輔(1852-1922)와 白鳥庫吉의 수차에 걸친 논쟁의 핵심은 요순우의 사적을 전하는 경전인 尙書 「堯典」과 「禹貢」편 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였고, 이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

으로 남아 있다.135) 이 논쟁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일단 그 원인을 제공한 핵심 문헌의 내용을 개관할 필요가 있다. 「요전」의 전반부는 帝堯의 공덕 찬양과 함께 요가 제정한 역법과 節令, 신중한 관리 임 용, 帝位를 이양할 舜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후반부136)는 帝舜이 즉위 전에 각종 검증을 거치는 과정과 함께 즉위 후의 제사와 巡狩, 州界 劃分, 형법 제정, 악의 무리 징벌, 관리 임용 등에 대해 서술한다. 대체로 요순이라는 고대 성왕의 뛰어난 업적과 함 께 고대 중국의 기틀이 마련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마천(기원전 145-86년경)은 史記의 첫 번째 장인 「五帝本紀」에서 「요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요순에 앞선 제왕인 帝 嚳과 帝顓頊, 黃帝의 이야기까지 추가하여, 황제에서 순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오제의 계보를 세웠다. 「우공」은 순으로부터 선양받은 하나라의 시조 禹가 (중국을) 九州로 나누고 그 山河 를 정비하여, 도읍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甸服과 侯服, 綏服, 要服, 荒服의 층차적 체계를 정했음을 전한다. 특히 아홉 개 주 각각의 지리(강과 산 위주)와 토질, 특산품을 명시하고 있 다. 「우공」의 내용 역시 사기의 두 번째 장인 「夏本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요순우로 이어지 는 이상적인 권력 이양(선양)과 함께 요의 나라 唐, 순의 나라 虞, 우의 나라 夏의 역사가 商 (殷)과 周, 秦, 漢으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사 체계의 앞부분에 자리 잡게 되었다. 고힐강이 세운 의고 이론의 토대를 제공한 최술은 唐虞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를 전하는 문 헌의 신빙성을 의심하면서, 중국 역사의 시작을 요순, 즉 唐虞시대로 보았다.137) 그러한 인식 의 기저에는 「요전」과 「우공」편 등이 담긴 (今文)상서라는 경전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일종의 종교적 확신이 자리했다. 최술과 동시대를 살았던 고증학자들 역시 일부 의고 경향에 도 불구하고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각주 30, 31), 왜 중국이 아닌 일본 에서 경전의 완결성이라는 선험적 전제가 배제된 최초의 논쟁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白鳥庫吉은 상서에 요순우 관련 핵심 내용이 담겨 있지만,

진시황의 영토 못지않은 우의 광범위한 치수

범위 등 요순우의 시대까지 소급되기 어려운 황당한 내용들을 우선 지적한다. 나아가 역법과 節令이 강조된 요의 역할(天)과 효와 덕이 강조된 순의 역할(人), 九州의 구획 과 치수가 강조된 우의 역할(地)에서 후대의 周易 「繫辭傳」 등에 나오는 天地人 三才說의 흔적을 찾았다. 문자학적 분석까지 추가하여 “高遠”과 “至高” 등의 의미를 지니는 堯와 “孝順”의 의미를 지니는 舜, “宇”나 “寓”와 통가 가능하여 “九州”와도 상통하는 禹가 고대 중국 인들이 유교적 이상으로 갈망하는 왕의 모습으로 창작되었으리라고 본 것이다. 白鳥庫吉이 보 기에 상서의 제작 연대는 빨라도 춘추시대보다 올라갈 수 없었다. 林泰輔는 이러한 주장을 “요순우 말살론”이라고 명명하며 4차에 걸쳐 반박했다.138) 대체로 유학자로서의 신념을 드러 내면서도, 당시로서는 새로운 자료인 갑골문까지 활용하며 논전을 펼쳤다. 갑골문을 통해 사 기 「殷本紀」에 언급된 상 왕들의 世系 및 그 왕조의 600년 존속설이 입증되었고, 갑골문에 나타나는 남방의 열대작물도 「우공」의 광범위한 영역을 입증해줄 수 있다고 본다. 그 성숙한 문자 형태 역시 1천 년 이상은 거쳤을 것이어서, 상 이전에 唐虞夏가 존재했을 개연성이 크다 고 강조한다. 그 앞선 시대의 제왕이 바로 요순우였을 것이므로, 그들에 대해 전하는 「요전」 이나 「우공」편 등도 周代보다 앞선 시기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139) 현재의 관점에서 양자의 주장 모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에도,140) 110년 전의 이 논쟁은 초보적 문헌 비판과 출토자료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이어지는 한 세기 동안 논쟁의 방향을 예비한다. 중국에서 1920년대 의고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이 개시되었을 때, 고고학 을 비롯한 서양 학문의 도래로 인해 성왕과 경전의 짐은 이미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중국 전 통 학문의 장단점에 대한 성찰 역시 고조되어 고대사의 우상 파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방아쇠를 당긴 고힐강이 주목한 것도 白鳥庫吉과 마찬가지로 요순우의 실체였지만, 논증의 수 준은 달랐다.141) 자신의 호마저 “의고”로 정한 일본 유학파인 「錢玄同 선생과 古史書를 논함」 이라는 제목의 논문(1923년)에서 고힐강은 禹의 神格을 중심으로 요순우가 人格으로 창출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전래문헌이 생성된 시점을 기준

으로 서주시대(詩經)에서 춘추 시대(「논어)까지 요순우에 대한 인식이 순차적으로 바뀌는 양상을 제시하고, 전국시대에서 진 한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순우에 앞선 제왕들이 덧붙여져 僞史로 창출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 논문 발표 이후 劉掞藜와 胡菫人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지만, 고힐강 역시 우의 天神性과 우 와 夏의 무관함, 우의 동물적 성격, 전국시대에 유래한 요순우 선양의 정치성, 周人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農神으로서 后稷 등으로 재반박하며 자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가다듬었다: 우는 서주 시기(1045-771BC)가 되어서야 출현하고 요순은 춘추 말년(5세기 BC)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출현할수록 더욱 앞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삼황에 속하는) 복희와 신농이 출현하고 난 뒤에야 요순이 뒷사람이 되었고, 우는 더욱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고대사는 누층적으로 조성된 다는 것, 그리고 발생의 순서와 배열은 계통에 반비례한다는 것이 그것이다.142) 이제 고대사 연구의 기본 지침으로 자리 잡은 “누층적으로 조성된 고대사” 설과 함께 “민족 一元”과 “지역 一統”, “古史 人化”, “고대의 황금시대”라는 우상 타파까지 강조했다.143) 고힐 강은 1926년 자신의 주요 연구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의 반론까지 모은 古史辨 제1책을 펴냈다. 자신이 고대사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게 된 배경과 핵심 이론까지 담은 장문의 「自序」가 서두를 장식했다. 이 책은 胡適이 “중국 사학계의 혁명적 책”이라고 평가했듯이,144) 1년 동안 20판을 더 찍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145) 이후 1941년 제7책까지 시리즈로 발간되어 당 시 중국 지성계에 던진 충격만큼 의고 인식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張蔭麟이 1925년 제기한 단편적 사료로 손쉬운 결론에 이르렀다는 이른바 “黙證의 오용” 같은 적절한 반박이 있었음에 도,146) 1960년대까지 중국 역사학계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했다.147) 그렇지만, 이 글의 앞부분에서 강조한 바 있는 20세기 후반의 고고학 성과가 1990년대 이 래 이러한 흐름을 바꾸고 있다. 예컨대 1970년대 이래 이리두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은 의고 파가 가공의 역사로 치부했던 夏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신출 청동기 금문과 초간 등 전국시대 출토문헌 역시 한대 이래 많은 문헌이 위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고힐강의 인식 에 균열을 내고 있다. 李零은 1988년 작성한 고대 문헌의 연대 재검토를 주장한 논문148)에서 고힐강을 비롯한 의고파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고문헌이 생성된 복잡하고 장기적인 과 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문제를 지적한다.

문헌의 생성 연대와 문헌에 나오는 내용

의 연대를 동일선상에 뒤섞고 내용상 연대가 늦은 것만 신빙성을 인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나아 가 출토문헌으로도 발견된 銀雀山漢簡 孫子兵法 등의 판본 비교 사례를 통해, 전래문헌(통 행본)에서 출토문헌의 어려운 글자가 통속자로 바뀌었고, 虛辭나 조사가 늘어났으며, 고풍스러 운 산문이 對句로 바뀌는 현상을 발견한다. 따라서 전래문헌이 후대인들의 첨삭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지만, 고대에 서적의 전파가 제한적인 탓에 위조의 동기가 크지 않아서 진위를 쉽게 단정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본다. 고문헌이 누층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맞지만, 고힐강이 주 장한 “造成”이 “作僞”로만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李學勤(1933-2019)의 주장은 더 구체적이고 강렬하다. 그 역시 경서의 권위를 타파한 의고 파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출토문헌을 통해 문헌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는 사례들을 열거 한다. 갑골문에 나오는 “王若曰”(왕이 이렇게 말씀하셨다)이 상서의 「商書」 여러 편에 나타 나는 “王若曰”과 같은 용례여서, 「商書」 및 시경 「商頌」과 商의 관계를 긍정할 수 있고,  逸周書 「祭公」편의 몇 구절도 서주 청동기 명문의 구절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문헌을 후대 의 저작으로 봤던 이전의 인식과 달리 서주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中山王 청동기 명문에도 뒤에 大戴禮記에 수록된 구절이 나타나는데, 이를 춘추시대의 樂武子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馬王堆 帛書에 포함된 전국시대 후기 문헌인 黃帝書의 구절이 그동 안 僞書로 파악된 鶡冠子에 인용되어, 할관자의 신빙성과 함께 그 연대까지 비교적 정확 히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파악한다.149) 따라서 이학근은 청대 고증학에서 시작되어 고힐강 의 의고를 통해 僞書로 확정되어버린 전래문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1997년 출간한 자신의 논문 모음집 제목을 走出疑古時代라고 명명한다. 고서에 대한 첫 번 째 대 반성인 의고 사조의 한계를 벗어나 고서에 대한 두 번째 대 반성으로 “의고시대에서 걸어 나오기”를 제창한 것이다.150) 이령과 이학근의 이러한 인식은 「堯典」과 「禹貢」의 생성 연대 역시 재고하게 한다. 이학근 은 상서 「요전」과 「皐陶謨」에만 나타나는 특징적 감탄사인 “兪”가 갑골문에도 동일한 용례 로 나타나는 것들을 열거하며 「요전」의 연원이 확실히 “古遠”하다고 본다. 문헌 전체의 신빙 성을 입증할 수는 없어도, 일부의 신빙성을 통해 다른 부분의 신빙성 역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151) 이령 역시 「우공」편을 서주 중기의 公盨 명문 및 容成氏 등 楚簡 문헌과 대조 하여, 그 주요 부분은 서주시기의 작품으로 보아, 이른 시기 중국의 지리 인식이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152)

나아가 두 학자 모두 의고 학풍

으로 인해 그동안 경시된 요순우와 黃帝, 炎帝 등의 신화전설이 용산시대의 고고학 자료와 상호 대조될 수 있다고 본다.153) 이령이 「우 공」편의 신빙성을 인정하듯이, 이학근도 「우공」의 구주를 용산시대의 고고학 구역과 각각 일 치시킨 邵望平의 연구154)를 높이 평가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張光直이나 蘇秉琦와 비슷한 인식이고, 후술하듯 리민(Li Min)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물론 이령과 이학근 모두 자신의 새로운 인식을 信古라고 표현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의고 학풍을 강하게 부정한 두 석학의 주장이 현재 중국학계의 신고 경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에 버금가는 석학인 裘錫圭가 새로운 출토문헌이 의고파의 오류 를 수정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의고를 연구자가 지녀야 할 기본 태도로 보아 신고로의 회 귀를 강하게 반대하는 것155)과는 차별화된다. 아직도 철저하게 의고 경향을 지키려는 연구자 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156) 그럼에도, 復旦大學 郭永秉이 요순 전설과 관련하여 내놓은 일종의 수정주의적 결론은 마지 막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석규의 제자인 곽영병은 선진시대의 요순우 등 帝系 인식을 다 룬 박사학위논문을 2008년 출간했다. 그 역시 고사 전설 자료에 대한 의고파의 비판이 타당 하므로 그들의 업적에 대한 무원칙적 공격은 지양할 것을 촉구한다.157) 다만 容成氏 등 초 간 문헌과 전래문헌을 비교 검토하여, 요순의 선양 전설이 전국시대의 일반적 인식이었고, 요 (당)와 순(우)이 별개의 朝代가 아니라 모두 虞代에 속하는 것으로, 실상 “虞, 夏, 商, 周”의 4 대가 전국시대의 보편적 古史 관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요순 전설은 이전의 인 식처럼 上帝 전설에서 분화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실제를 반영하는 것으로, 용성씨 에 기술된 요순 등의 선양 과정 역시 원시사회의 군장 推選制 흔적으로 본다. 다만, 舜을 평 민 출신으로 묘사한 것과 같은 그 전설에 추가된 이야기의 元素는 부회 혹은 날조되었을 가능 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한다. 또한 大戴禮記 「帝繫」(사기 「오제본기」도 마찬가지)에 요의 선조로 나타나는 帝嚳과 摯, 순의 선조로 나타나는 宮蟬과 敬康, 句芒, 蟜牛 등은 출토문헌으 로 입증될 수 없고, 황제를 시조로 한 五帝의 대일통 체계 역시 후대의 산물일 것으로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