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영향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에 끼친 영향은 미약하며 따라서 문화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문화는 이미 고대 가나안 사 회에서 나타났다. 초기 청동기 시대의 원통형 도장에 새겨진 문양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102) 원통형 도장 외에도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장과 인장에 새겨진 일부 문양과 소위 황소 머리 신상은 메소포타미아에 지역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 엘 람 지역에서도 발견된다.103) 아라드의 초기 청동기 시대 지층에서 발견된 돌에 새겨진 문양은 발굴자에 의하여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 신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되었는데104) 학자들에 의하여 대체적으로 수용되었다.105) 이 시대에 이어 중기 청동기 초기(기원전 21세기), 비록 무덤에서 발견된 것 이기는 하지만 약 7센티미터 높이의 은잔은 돋움 장식에서 알려진 묘사로 인하여 이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의 관계성을 보여준다.106) 야딘은 묘사된 내용이 메소포타미아의 주 신 마르둑이 티아맛과의 전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쉬’와 연 관된 것으로 해석하였고107), 이후 게이츠는 메소포타미아 문화와 지방 문화의 혼합으로 해 석하였다

기원전 2천년대의 고대 바벨론 시대

(중기 청동기 시대)부터 기원전 1천년대의 신- 앗시리아 시대(철기 시대)까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에서 약 100개 가까운 쐐기문자 토판 이 발견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절정체인 쐐기문자 토판은 행정문서, 왕정문서, 편지, 문학작품 등 다양하다.109) 지역적으로도 북쪽 하솔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중앙 산 악지역과 쉬펠라 또는 평지 지역에 이르기까지 지역적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길가메쉬 서사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문학작품이 가나안에 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110), 가나안 사회에서도 읽혀졌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 서사시가 기록된 아카드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기원전 15세기 때 가나안을 지 배하고 있었던 이집트와의 관계 속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작품의 수입을 이해할 수 있지 만, 다른 토판들과 함께 고려해 볼 때, 이 문학작품은 이집트인보다는 가나안인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철기 시대와 후기 철기 시대 초기(기원전 12-9세기)에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 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 특별히 중간의 아람 세력으로 인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하반기에 이르러 앗수르 세력이 유입된 이래 바벨론을 거쳐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 동안 이 지역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 기원전 7세기 말까지, 몇몇 장소들에서 앗수르의 관청, 건축 양식 등이 신앗시 리아 제국의 비문, 토기, 진흙관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111) 앗수르 멸망 이후 패권을 차지하였던 바벨론이 이 지역 정복 후 정치적으로 지배하 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지배 연한이 그리 길지 않은 것과 아울러, 정치적, 경제적 지배가 주목적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된 다. 이후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은 포용정책을 표방한 것112)과 별도로, 문화적으로는 이 전의 제국 세력에 뒤지지 않는 문화적 영향력이 나타났는데,113) 특히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 여 화폐의 사용 즉, 동전이 소개되어 처음으로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히타이트 문명

세계 문명사에서 크게 취급하지는 않지만, 가나안 지역을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에 끼친 히타이트 문명/제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나톨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형 성된 히타이트 문명은 하투샤를 수도로 하는 제국을 이루었고(기원전 약 1650년), 이 지역에 서 처음으로 철제 무기를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히타이트 문명/제국은 기원전 12세기 초, 서 쪽으로부터 이동한 해양민족으로 인하여 멸망 당하기까지 약 4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와 함께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한 세력이었다.115) 히타이트 문명이 발생한 아나톨리아 지역의 영향력은 제국이 발생하기 이전에 일어 났는데 그 지역의 광석, 즉 흑요석에 기인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의 흑요석 수입은 일찍부 터 일어났는데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석동기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광석 뿐 만 아니라 이 지역은 독특한 기술을 전파하였는데, 석동기 시대의 나할 미쉬마르의 정교한 청동 제품들의 기술은 아마도 아나톨리아에서 전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116) 구약성서에서는 히타이트 민족에 대한 구절이 청동기 시대와 후기 철기 시대에 집 중하여 기술하고 있지만,117)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내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알려진 이 들의 물질문화에 대한 증거는 히타이트 제국이 존재하였던 후기 청동기 시대에 집중되어 나 타나는데,118) 이는 문명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스/로마 문명

기원전 4세기 말까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은 문명사적으로 고대 근동 지역의 영 향권 아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일부 움직임을 제외하고,119) 지중해 서쪽 세력 즉, 서구 세 력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문명과 문화적 영향력은 4세기 말 이후에 와서야 두드러진다. 기원전 4세기 하반기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그리스 본 토의 세력을 진압하고, 이후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진하여 페르시아가 다스렸던 영토, 즉 이집트, 이스라엘/팔레스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포함한 고대 근동 전 지역과 인도까지 이 르는 제국을 이루게 되었다.120)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지는 문명과 문화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그리스/로마의 문명/문화의 영향은 신전121), 히포드롬122), 원형극장123), 온천124)과 목 욕탕, 연회장(트리클리니움), 수영장125), 연못126), 카르도127), 수로128) 등 도시 건축물과 항만시설129)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건축물들의 규모와 크기는 이전 시대와 차이점을 두 며 뿐만 아니라, 최초로 사용한 콘크리트 등 건축 기술에 있어서도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건축물 안의 프레스코, 스투코, 모자이크 등의 건축 장식130) 그리고 그리스와 라틴어로 쓰인 비문131) 등이 이 지역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논쟁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이다. 이 지역에서 이것이 논쟁의 주제가 된 것은 성서의 배경이 된 지역이기 때문이며, 성서의 영향력으로 이 논쟁이 세계 곳곳의 성서학자, 역사학 자, 성서고고학자들에게 확장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고고학적 연구 활동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고대 유적과 유물을 어 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 즉, 고고학적 잔여물들을 역사 재구성을 위하 여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의미만 인정할 것인가?에 대 한 이해 차이다. 이 논쟁은 고대 문명/고대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학적 의미를 지니므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이 논쟁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어디선가 적 지 않은 학자들이 다루었다.132)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 논쟁을 살피고자 한 다첫째,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이 발발한 이유와 연관된 것으로 고고학적 발견 물을 바탕으로 기록된 문서(구약성서)의 역사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 를 보여준다. 이는 필요불가결하게 기록된 문서와 고고학적 발견물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전의 바벨/비벨 논쟁133)으로 구약성서의 의미 해석에 입장 차이 를 보여주며 논쟁한 것이 성서의 내용을 고대 근동 문서를 비교함으로써(즉, 문서와 문서와 의 비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은 구약성서의 내용과 고고 학적 발견물과 비교함으로써 논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논쟁의 기저에는 모두 구약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 연구 방법론에 근거한 성서 이해가 깔려 있다. 즉 성서는 각기 다른 저술가에 의하여 각기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으며, 성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해진 성서의 내용의 시대와 저술 시대와 편집 시대가 각각 다르며 이러한 이해는 전해지는 내용의 사건과 인물은 역사성이 없거나 저술 시대 또는 편집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는데 이 입장은 당대의 물질문화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발견물을 최소한으로 성서의 내용과 연결시키려는 견해, 즉 최소주의자 적 입장을 지닌다. 반면, 성서가 전해지고 있는 인물과 사건의 시대보다 후대에 기록되고 편집되었지만, 기술하고 있는 내용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며 역사성이 있다고 이해하며 이를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물들과 연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스 럽게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구약성서가 전해주고 있는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를 가진다둘째, 이 논쟁은 흐름이 있다. 크게 세 가지 흐름이 발견되는데, 19세기 상반기의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은 알트와 노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학파와 올브라이트, 라이트 를 중심으로 한 미국학파 간의 논쟁으로서, 성서가 전해주고 있는 내용의 역사성에 대한 논 쟁이었다. 1970년대 이후의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간의 논쟁은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에 의하 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고고학적 발견물과 성서 외적 자료에 의하여 성서의 내 용 이해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는 단지 논쟁 을 하는 것이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를 통하여 다른 자료, 즉 성서 자료의 내용과 역사에 수정할 것을 주장한 것으로 성서를 편집된 시기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고고학적 발견물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되 었다. 고고학적 발견물들도 읽어내야 할 문서이고,135) 발굴자들 또는 발견물에 대한 비평 가들의 해석은 그들의 사상적 차이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136)과, 구약성서와 함께 역사 자료도 역사가의 관점에 의하여 기술된 것이라고 점을 이해한다면, 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 른 자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할 수 있다.137)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최대주의자/최소주의자 논쟁은 또 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 이하게 되는데 이른바 ‘저연대 논쟁’과 더불어 등장하게 되었다.138) 기존의 설정된 고고 학적 유적들의 연대를 내림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역사와 연관시켰던 고고학적 내용들에 대 한 이해를 달리 가져왔다.139) 역사에 대한 이해가 관점 또는 해석학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 이 아닌 연대의 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대두 되는데 하나는 이전 시대와 같이 성서가 전해주고 있는 내용은 후대 시대의 반영이라는 주 장이 단지 성서 편집사적 측면에서 주장된 것이 아닌 고고학적 논의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좀 더 심화되어 나타났다. 즉, 성서의 내용이 고고학적 논의를 살펴보았을 때, 후대의 고고 학적 지층들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 해석을 신명기 역사서의 중심 인물인 요시야 왕으로 귀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0) 또 다른하나는 저연대 논쟁으로 인하여 성서 의존적 연대 설정과 해석과 무관한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으며, 방사성동위원소 탄소 14와 같은 절대연대 설정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옥스 퍼드 대학교에서 이루어진 절대연대 논의조차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지만,141) 저연대 논 쟁은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의 연대 설정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켰다. 이러한 논쟁은 해석 이전에 먼저 기초 자료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