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기(1990년대 중반- 2000년대 중반)

이전 시기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의 시기라고 한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 지역의 고고학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논쟁, 즉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저연대”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에 대해서 이미 어디선가 다룬 바가 있다.43) 간략히 정리하자면 텔아비브 대학교 고고학과에 재직하였던 핀켈쉬타인이 1995년과 1996년에 두 개의 글을 발표하면서 기존에 알려졌던 층위별 연대 설정을 흔들어 놓았다.44) 기존의 블레셋 정착 연대를 기원전 12세기 상반기로 설정된 것을 기원전 하반기로 연대 설정하여야 하고, 기존의 기원전 10세 기로 연대 설정된 통일 왕국 시대의 지층들을 기원전 9세기로 끌어내려야 함을 고고학적으 로 논하였다.

핀켈쉬타인은 기원전 12세기

상반기는 기원전 12세기 하반기로, 기원전 11세 기로 연대 설정된 지층들은 모두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 10세기는 9세기, 9세기의 것은 8 세기의 것으로 연대가 내려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의 주장을 발굴된 장소들에 적용 하여 논쟁의 장을 확대해 나갔다. 핀켈쉬타인은 게셀, 하솔, 아스돗, 텔 레호브 등지의 발굴 자들이 설정해 놓은 층위별 연대를 모두 그의 저연대 주장에 근거하여 연대를 재설정하였 고, 이는 곧 발굴자들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5) 2000년대 초반에는 이 연대 논쟁을 절대 연 대법인 방사성동위원소 탄소 14의 결과로 해결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다.46) 또 한편, 이 시기 고고학사에서 의미 있는 연구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방사성동위원소 탄소 14를 비롯한 자연과학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GPR, 페트로그라피 분석, 화분 분석, 화학 분석 등이 시행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주제 가 좀 더 세분화 되고, 전문화 되었는데 그 한 예로, 고대 뼈 분석, 식물 분석 연구가 이루 어져 발굴 보고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성숙기(2000년대 초/중반 이후- 현재)

다.46) 또 한편, 이 시기 고고학사에서 의미 있는 연구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방사성동위원소 탄소 14를 비롯한 자연과학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GPR, 페트로그라피 분석, 화분 분석, 화학 분석 등이 시행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주제 가 좀 더 세분화 되고, 전문화 되었는데 그 한 예로, 고대 뼈 분석, 식물 분석 연구가 이루 어져 발굴 보고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 이전에는 없었던 큰 논쟁이 일어났다. 하나의 납골함으로 인하여 위조 품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그 내용은 아래 III.5.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골동품 수집가였 던 오데드 골란이 고문서학자 앙드레 르메흐에게 납골함을 보여주면서 연구를 촉발케 하였 고 르메흐의 연구 결과가 고고학 잡지에 출판되었다. 학계에 알려진 후 위조품 논쟁이 불거 졌고, 이 납골함의 진위 문제는 법원 소송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 중에서 오랜 동안 이스라 엘 박물관에서 솔로몬 성전 기물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전시된 석류 모양의 상아 제 품이 위조품이라는 논의도 진행되었다(아래 III.6 참조).47) 이러한 과정은 이스라엘/팔레스틴 고고학사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성 서고고학계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되지 않은 유물에 대해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음을 드러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발굴 허가권을 수여하는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존재감이 더욱 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조품 논쟁에도 불구

는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존재감이 더욱 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위조품 논쟁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발굴과 그 연구 결과가 출판되었다. 먼 저 에일랏 마자르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다윗성 G 지역 산등성이 위쪽이 2005년 이후 발굴 되었다.48) 이 발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니는데, G 지역을 발굴하였던 이전의 학자 들의 가정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확인되었고(즉, G 지역의 27개의 계단 구조물(Stepped Stone Structure))이 산등성이 위쪽에 거대한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건축 구조물이었다는 가 정이 마자르가 Large Stone Structure로 명명한 건물로 확인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 는 이 건물이 마자르에 의하여 계단 구조물과 동시대 즉 통일왕국 시대의 것으로 해석되었 으나 다른 학자들에 의하여 헬라 시대의 것으로 편년되며 달리 해석되었다. 이는 2 1 세 기에 접어 들어서도 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간의 논쟁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에 이어 이 논쟁이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발굴된 키르벳 케이야파 발굴 결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쉬펠라 지역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이 곳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두 개의 성문과 포곽 성벽으로 이루어진 요새화된 도시, 관청과 공공 저장고 등의 공공 건 물, 계획적인 도시 건설, 두 개의 비문 등이 발견되었고, 토기 형태학 비교 등 상대 연대와 방사성동위원소 탄소 14를 통한 절대 연대 등을 통하여 기원전 10세기 초 즉, 다윗 시대의 것으로 편년되었다.49)

키르벳 케이야파

그러나 최소주의자들은 키르벳 케이야파는 다윗 시대의 것이 아닌 기원전 1050년부터 시작하여 920년에 이르는 매우 긴 기간에 존재하였던 곳이며, 다윗과 상관 없는 것으로 블레셋 아니면 가나안의 것이거나, 아니면 사울 왕국의 것으로 주장하였다. 최 근에는 이 장소가 군사 방어 거점으로서 거하였다는 해석50)을 배제하고 제의를 위한 장소로 해석하였다.51) 이 시기에는 고고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발굴 보고서가 출판되었다. 이것들은 비발 굴자들로 하여금 발굴 내용을 파악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발굴 내용을 체계적, 객관적, 과 학적으로 정리하여 보고하고, 전문가의 연구 내용까지 포함하여 고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 다. 언급할 만한 보고서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