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성장기(1948년-1970년대)

이 시기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에는 두 개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1948년도에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67년도에 일어 난 6일 전쟁이다. 이 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그 결과는 각각 전쟁 이후 이 지역의 고고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먼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으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장소들에 대한 발굴 권한이 이스라엘로 점차 넘어가게 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는 이스라엘 학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전의 서구 중심의 이스라엘/팔레스 틴 현지 발굴에서 이스라엘 학자들 중심으로 고고학적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들을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 과 연결시키려는 노력과 결부되었는데, 즉 고대 이스라엘인과 현대 이스라엘인 간의 연결고 리로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적으로 구약성서 본문에 쓰인 내용의 정확성과 진실성을 밝히는데 주력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독립한 이후 이루어진 주요한 발굴

로 이갈 야딘의 감독하에 이루어진 하솔 발굴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었던 벤-구리온 수상의 전폭적인 행정적 지지와 로스챠 일드 가문의 재정적 후원하에 1955-1958년간 하솔 발굴이 이루어졌다. 야딘은 이 발굴을 통 하여 이전까지 알려지지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도시 하솔의 진상을 드러내었고, 기원전 13 세기 하반기에 화재로 파괴된 흔적을 구약성서에 언급된 구절(수 11:10-13)과 연계시켰다.37) 이는 가나안성을 파괴시키고 정착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을 새롭게 정착을 시작한 현대 이스라엘인들의 모습과 중첩시켜 그들의 정착 정당성의 기원을 성서에서 찾게 하는 결 과를 낳았다. 앞서 유럽의 제국주의의 정치적 관계가 고고학과 연관되는 모습과는 다른 양 상이기는 하지만, 정치와 고고학간의 상호연관성을 보여준다. 민족주의적 경향이 있었지만, 고고학사에서 야딘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놓았 다. 하솔 발굴과 이후 행한 므깃도와 마사다 발굴을 통하여 이스라엘/팔레스틴 고고학의 수 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마사다 발굴을 통하여 요셉푸스가 기록한 유대인들 의 역사를 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생생히 복원하여 재구성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문서 즉, 역사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서로 비교하여 서로의 특성을 발견하고, 이 둘의 상호 조 합을 통한 역사 재구성의 방향으로 이끌게 하였다. 므깃도 발굴을 통해서 그는 이스라엘/팔 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내용을 성서의 내용과 연결시키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전의 발굴 결과 내용들을 다시 분석하여 재해석하였고 그의 수정된 해석은 이후의 발굴에 의해그의 해석이 옳았음이 확인되었다. 어떻든 그의 분석과 재해석은 고고학 장소들의 발굴자들 이 발굴하고 해석한 결과들이 이후의 다른 발굴자들에 의하여 재해석됨을 각인시켜 주었고, 발굴자들로 하여금 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의 해석으로 노력하게끔 보이지 않는 기 여를 제공하였다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

그 이전에 일어났던 전쟁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세 나 라로부터 중요한 영토, 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시리아로부터 바산 골란 지역, 요르단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포함한 중앙 산악 지역,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시내 반도 지역을 정치적으로 차지하게 되었다. 영토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 적 탐사와 발굴이 가능케 되었음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한 활발한 고 고학적 연구를 실행하였다. 6일 전쟁 이후 탐사단을 네게브 지역과 시내 반도 지역에 파견 하여 필요에 따라서는 발굴을 시행하였다. 이스라엘탐사협회를 통하여 모쉐 코카비가 유다, 사마리아, 골란 지역을 지표조사 하였다. 이전에는 연구지역에서 소외되었던 시내반도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고, 네게 브 지역에 대한 발굴과 조사가 행해졌다. 1960-70년대에 텔 마소스, 텔 에스다르, 텔 아로에 르 등과 함께 네게브 고산지에 있는 고고학적 장소들이 발굴되었고, 이 시기 쿤틸렛 아즈루 드가 즈엡 메쉘에 의하여 발굴되었다(1975-1976). 또한 가데스바네아(1975-1982)가 루돌프 코 헨에 의하여 발굴되었는데, 그는 이 발굴 중에 시작하여 80년대 말까지 네게브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행하였다. 이러한 지표조사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뿐 만 아니라 그 결과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그 지역의 정착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시기에 새롭게 조사된 지역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곳은 바로 예루살렘이 다. 성전산 남쪽과 서쪽 부분이 대규모로 발굴되었으며, 나흐만 아비가드에 의하여 유대인 구역이 발굴되어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도시의 확장과 요새화의 모습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 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한 파괴의 모습을 드러내어 성서의 구절과 역사서술에 기록된 내용의 실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이스라엘 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역이라는 주체성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는데, 이는 곧 이 시기에 구석기 시대의 유적도 발굴 하는 사례를 낳게 하였다. 이는 기존의 성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이 지역의 고고학적 연구의 발전을 꾀하였던 것과 달리, 지역 주민의 지역 역사 이해에 기반을 둔 연구이기에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 발굴로는 우베이디야 발굴(스테켈리스(M. Stekelis), 1960-1966; 바르- 요세프(O. Bar-Yosef)와 체르노프(E. Tchernov) 1967-1974)이 있다.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구 업적이 두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토기형 태학을 집대성한 책이 출판된 것이다.38) 아라드를 발굴하였던 루스 아미란이 신석기 시대부 터 철기 시대까지의 토기를 시대와 지역별로 형태를 나누어 분석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이 는 그 시기까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토기의 형태별 집적과 층 서학과 토기형태학의 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것으로, 각 시대별 토기의 특징과 형태를 파악 할 수 있는 연구물로서 최근의 출판물39)과 함께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연 구 결과물을 통하여 발굴자들로 하여금 발굴 과정에서 각 층위를 토기 형태를 바탕으로 시대를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는 래리 툼스

과학적인 발굴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그는 유적 발굴 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계획도를 매일 작성하여 발굴에 의하여 변형되는 유물과 유적을 기록 으로 남겼다. 그는 또한 오늘날까지 현장에서 사용되는 가장 작은 고고학적 단위인 로커스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는데, 이는 파괴의 학문인 고고학을 과학적인 기록의 학문으로 변 모케 하는 기여를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방법론의 발전은 196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 학풍을 일으킨 신고고학의 흐름속에 고고학을 과학으로 접근케 한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주요한 발견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이 지역의 고고학사에서 의미 있는 두 가지 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시기 바로 이전(1947)에 발견되었던 쿰란 사본이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행해진 탐사(1948-1956)에서 발견되었다.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쿰란 사본은 이전까지 알려진 히브리 성서 사본의 연대를 약 일 천년 앞당겼고, 당연히 성서학자들의 관 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연구가 단지 성서의 배경 또 는 지엽적인 성서 구절과 연관된 논의의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성서 사본 이해 전체를 뒤바꾸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62년에서 1966년간 행해진 아라드 발굴을 통하여 가나안 지층(지 층 IV)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집트를 통일시킨 나메르의 세레크이다. 이 세레크는 이후 텔 에라니 등 다른 장소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통하여 초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 지층 이 나메르 시대의 것임을 확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아래 지층에서는 석동기 시대의 지 층이, 그 위쪽에서는 초기 청동기 시대 중기의 지층이 발견됨에 따라 나메르 시기는 초기 청동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역사적 시대와 고고학적 시대를 서로 연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구약성서 시대에 의존하였던 중기 청동기 시대부터 후기 철기 시대까지의 고 고학적 시대에 앞선 시기를 결정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혼란기(1970년대 말-1990년대 초)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른바 수정주의자들 또는 부정주의자들의 연구 가 전 세계 학계에 영향을 주었다.40) 이들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 와 함께 구약성서의 역사비평적 분석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구약성서는 페르시아 시대 또는 헬라 시대에 저술된 것이며, 역사성을 지닌 것이 아닌 후대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그 가운데 논란의 쟁점이 되었던 시대는 지금까지도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다윗과 솔로 몬이 속한 이른바 통일왕국시대에 대한 논의다. 쉐필드 대학교의 데이비스와 화이트램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라이덴 대학 교의 렘케와 톰슨이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결과물들은 기록된 문서이자 경전인 구 약성서에 쓰인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기존에 알고 있던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부정 또는 수정해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41)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고고학사에서 전환점을 가져온 것으로, 이전까지는 성서에서 출발하여 고고학적 활동의 원동력을 얻고, 발 굴과 조사의 결과를 성서 중심으로 또는 성서와 연관시켜 해석하였던 반면, 이제는 고고학 적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성서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부정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해석이 이 루어진 것이다. 또는 이는 우리에게 남겨진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 이를 통하여 성서/기록된 경전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쓰인 내용 을 최대한의 역사적 의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최대주의자- Maximalist) 아니면 최소한도의 입장에서 역사적 의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최소주의자- Minimalist)라는 입장 차이로 학자들 의 견해를 가를 수 있는 구분 경계가 발생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이 시기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연구 한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도탄 부부(모쉐 도탄, 트루데 도탄)에 행해진 블레셋 연구이다. 이는 비록 이전 시대부터 행 해진 성서에 기반을 둔 연구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유대인 학자들이 민족주의적 경향에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방향에서 벗어났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가나안 지역 에 정착한 이방 민족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블레셋 정착 장소 를 발굴하면서 트루데 도탄은 블레셋에 관한 연구 주제를 집대성하였다.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