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1890-1910년대)- 층위학과 토기 형태학의 등장

1890년대가 첫 번째로 시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는 이유는 신학자, 군인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활동이 있었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 처음으로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에 의하여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 내에서 발굴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 고고학자였던 페트리

앞서 언급하였던 19세기 중반에 설립된 팔레스틴탐사기금에 고용되어 이스라엘/팔레스틴 남서쪽에 위치한 텔 엘-헤시(Tell el-Hesi)를 과학적-고고학적 접근으로 발굴하였다(1890-1892년). 즉 하나의 고고 학적 장소에 고대 거주층 위에 이후 시대의 도시가 누적되어 층을 이루어 인공적인 거주 언 덕이 형성되었음을 인지하고 발굴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발굴하 면서 후대의 거주층부터 고대 거주층까지 거주 모습을 역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는 텔 엘-헤시를 성서의 라기스로 동일시하는 지명 확인의 오류를 범하였지만, 고대 유적 지의 층위학적 형성 과정 이해를 바탕으로 각 지층의 거주 모습과 각 층에서 출토된 유물이 서로 다른 시대적 모습을 지닌다는 역사적 이해를 가져왔다. 이전과는 달리 텔 엘-헤시 지 층 1, 지층 2, 지층 3 등의 층위학적 구분이 이루어졌고 이는 곧 각 지층이 어느 시대의 것 인지 역사적 구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결과는 고스란히 그의 발굴보고서에 담겨져 있 다.21) 이러한 층위학적 이해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층위별로 출토되는 토기 형태가 변화된다 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층위별로 출토된 토기 조각을 형태별로 배열함으로 층위별 토 기 형태가 변화함을 인지케 한 것이다. 이는 성서고고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가져다준 것 인데 왜냐하면 고고학적 발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토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발굴 된 유적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고고학적 초석이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 다.

페트리에 의하여 고고학적 초석이 놓인 것과 함께 이 시기에 성서의 주요 도시들이 발굴되었는데 주요 발굴지와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1898-1900년, 프레드릭 존스 블리스와 로버트 알렉산더 스튜어트 메칼리스터의 쉬펠라 지역 발굴- 발굴 방법이 체계적이지 아니함, 모호한 연대 설정.22) 2) 1903-1905년 고트리브 슈마허의 므깃도 발굴- 트렌치 발굴 – 발굴 방법이 발전 하지 아니함, 시대별 도시 윤곽을 발견.23) 3) 1902-1909년 로버트 알렉산더 스튜어트 매칼리스터의 게셀/게제르 발굴- 트렌치 발굴- 발굴 방법이 발전하지 아니함, 넓은 폭의 시대 구별, 가나안인들의 무덤, 가나안인들 의 주상과 산당 시설, 게셀 월력/농사력이 발견.24) 4) 1907-1909년 – 여리고(텔 에스-술판) 발굴 5) 1908-1910년 조지 라이스너- 사마리아 발굴- 훌륭한 일꾼 통제, 유적지의 형성 과정 이해를 바탕으로 유적의 복잡한 구조와 다양한 지층을 구분, 사진과 도면 그리고 자세 한 설명을 통하여 발굴 결과를 소개

특징

첫째, 대규모 발굴이었고, 둘째, 트렌치 발굴 이었으며, 셋째, 성서 즉, 구약성서의 중심도시 중심으로 발굴되었다. 넷째, 아직 고고학적 구분은 분명치 않아 성서 역사 중심으로 층위를 구분하였고, 마지막으로, 제국주의적 경향 아래 탐사가 이루어졌다. 앞서 소개한 발굴 이외에, 이전에 실행하던 탐사가 이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붕괴 이후 팔레스틴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유럽 국가들이 이 지역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기에,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탐사와 발굴 조사가 유럽 국가 출신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탐사와 발굴이 제국의 왕실 또는 준- 국가 협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26) 마지막으로, 광야 지역 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로렌스와 울리는 신광야 지역, 네게브 지역, 아라바 광야 지역 의 고고학 유물을 기록하였다.27)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주의적 목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적 가치가 있어 이 지역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 이스라엘/팔레스틴 이 외의 지역에서 알려진 중요한 발견물, 메렌프 타 비문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소위 이스라엘 비문으로 알려진 이 비문은 1896년 2월에 페트리가 룩소의 한 신전 발굴에서 발견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신왕조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렌프타에 의하여 세워진 전쟁 승리 비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메렌프타가 그의 집권 초기 시행한 리비아와 가나안 등 이집트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고자 원정 전쟁하여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문이 중요한 것은 성서에서 여러 번 기록된 지역 또는 민 족명인 가나안과 아스글론, 게셀 등 지명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 외적인 자료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이름 뒤에 기록된 한정사는 사람들 의 무리, 즉 민족 또는 백성을 지시하기에 고대 근동의 역사와 함께 이스라엘 역사를 연결 시키는 중요한 자료이다

발전기(1920-1940년대)- 성서고고학 전성시대

이 시기는 성서고고학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이전과는 달리 성서의 장소들에 대한 활발한 발굴이 곳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두 번째, 지금까 지도 쓰고 있는 톰센의 삼시대 구분법(석기, 청동기, 철기)29) 즉, 고고학적 시대 구분법을 이 시기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고고학적 기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층위학 적 기틀과 토기형태학적 기틀 위에 고고학적 시대 구분으로 층위들을 구분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셈족 시대, 유대인 시대 등 민족을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30)을 이제는 고 고학적 시대 구분으로 세계 고고학사와 그 맥을 같이하게 되었다. 전성시대라 불리는 마지 막 이유는 발굴된 결과를 통하여 성서 사건/기술과 고고학적 결과물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성시대를 가져오게 된 것은 사람의 변화였는데, 즉 이전에는 외교관, 군 인, 성직자들의 탐사 활동이었던 반면 이 시기에는 학자들이 발굴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의 발굴은 이전의 제국주의적 접근은 점차 사라지고 학술적인 접근 으로 이루어져 발전하였다고 평가된다. 국가/준국가 협회에서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던 탐사 및 발굴 활동은 사라지고 이제 대학들의 후원을 받아 학자들이 발굴함으로써 연속적인 후학 양성이 필드에서 이루어졌고, 발굴 시기는 학기 중에 대체로 진행되지 않고 여름 방학 기간 에 발굴 작업이 행해졌는데 이러한 전통은 몇몇 경우와 구제 발굴을 제외하고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학자들을 통한 체계적인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어31) 발굴한 내용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심화되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올브라이트

이 시기 중요한 학자로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올브라이트(W.F. Albright)를 꼽을 수 있다. 성서학자이자, 언어학자이자 고고학자로 활동하였던 그는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을 발굴하면서 삼시대 구분을 기초로 고고학적 시대 구분을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체 계적인 발굴보고서를 남겼다.32) 또한 그는 발굴에서 출토된 자료들을 성서 본문과 성서 외 적 자료와 연관, 비교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학술적 업적을 남겼으며, 일반대중들에게도 성 서고고학을 남기는 저술 활동을 펼쳤다.33) 올브라이트가 미국의 개신교에 속한 학자라고 한 다면, 이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 유대인 성서고고학자는 넬슨 글룩이었다. 올브라이트의 제 자였던 그는 요르단 동쪽 지역과 네게브 지역에서 개척자적 연구를 실행하였다. 그 지역을 여러 차례 탐사하여 성서의 암몬, 모압, 에돔, 미디안 지역의 유적지를 확인하였다. 추가적으로 이 시기 이스라엘/팔레스틴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연구방법론의 획기적 인 전환을 가져온 인물로서 캐슬린 케년이 있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그녀는 영국에서 함 께 발굴하던 모터머 휠러와 함께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정방형 발굴 방법(square excavation method)을 개발하여 사마리아 발굴 시 처음으로 적용하였다. 이는 이 지역의 고 고학적 발굴 방법에 과학적인 접근을 가능케 한 것으로 위에서부터 발굴할 시 변화되는 토 양의 성분과 색, 출토되는 유적과 유물의 변화 등을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출토되는 토기와 유물을 다른 양동이(버킷)에 담아 발굴 이후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