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전통과 서양 담론의 결합

앞 절에서 살펴본 고문자와 출토문헌이 고고학에 큰 빚을 지고 있듯이, 20세기 이후의 중국 고대문명 연구는 고고학이 주도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현재까지 100여 년에 걸친 그 연구의 일관된 목표는 바로 중화 민족사의 재건이다.52) 그러나 고고학이라는 학 문 자체가 중국의 학문 전통과는 거의 무관한 서양 근대 과학의 산물인 까닭에, 중국의 고고 학은 전통의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다양한 방식으로 서양의 담론에 조응하며 토착화되었다. 특히 고고학의 도입기가 전통 학문에 대한 반성이 고조되면서도 중국 자체의 근대적 학문 역량이 아직 갖춰지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 고고학의 시점

으로 1928년 李濟를 비롯한 중국학자들이 이끈 안양의 은허 발굴을 중시하는 경향과 달리,53) 신해혁명 이 후 중국의 격동기를 몸소 체험한 이제 자신은 은허 발굴을 가능케 한 두 가지 조건으로 갑골 문의 발견과 1910년대 중반 이래 서양 지질학자들의 역할을 들었다.54) 이제는 우선 중국 지 질학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미국인 아마데우스 윌리엄 그라보(Amadeus William Grabau, 1870-1946)를 위시한 다수의 서양 과학자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그 방법론을 전수했음에 주목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라보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와 1914년부터 지질조사에 참여한 스웨덴의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 1874-1960)이 “현장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적용한 실제 고고학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그의 여러 성과 중에 “최초”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아야 마땅한 것은 바로 1921년 하남성 仰韶村의 발굴이다.55) 이후 감숙성의 발굴과 함께 중국의 최초 문명으로 채도 위주의 앙소문화 설정은 향후 수십년 동안 중국 고고학의 향방을 좌우했다. 그것은 바로 안데 르손이 결론으로 내놓은 중국 문명의 서방기원설과 그에 대한 중국 고고학계의 대응이다(II장 1절에서 상술). 이제와 마찬가지로 안데르손의 지대한 역할을 인정한 장광즈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지질학자 이자 고생물학자인 안데르손이 편년이나 역사적 비교를 위해 몇 점 안 되는 토기편 같은 표준 화석(index fossils)에 지나치게 의존한 한계를 지적한다. 나아가 안데르손을 넘어 중국에 고 고학의 핵심을 소개한 이제의 주도로 1937년까지 15차에 걸쳐 진행된 안양의 은허 발굴이 중 국 고고학사에 끼친 후학 양성 등 큰 성과에 주목한다.56) 하지만 중국 최초의 장기에 걸친 국 가적 발굴 사업이 선사 유적이 아닌 역사 유적에서 이루어져 자연과학에 경도된 독립된 고고학보다 호고주의 전통과 결합한 중국사의 하부 분야로서 고고학이 태동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다.

1930년대에는 안양 이외

에도 서부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산동성의 용산문화 등 중요한 발 굴이 이어졌다.58)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은 공산당이 영도한 1949 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야 재개되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를 비롯한 발굴 기 관의 설립과 북경대학 등 대학의 고고학 전공 개설을 기반으로, 전국 각지의 대규모 건설에 따른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유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장광즈는 1970년대까지 중국 고고학이 겪 은 중요한 두 가지 변화로 또 다른 서양 사조인 마르크스의 역사유물주의가 고고학 자료 해석 의 이론적 토대가 된 점과 고고학이 국가 주도 사업이 되었음에 주목한다. 중국 고대사의 발 전을 마르크스의 사회발전 모식에 적용한 곽말약의 中國古代社會硏究(1930)를 모델로 생산 관계와 계급 투쟁에 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고고학 자체가 정치에 활용되는 경향이 뚜렷했다. 다만 여전히 전통 역사학에 경도된 중국 고고학의 독자성 탓에 이데올로기적 용어가 자료 분 석과 명확히 분리되어 그 학문 자체에 본질적 영향은 미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59) 그 이데올 로기적 교조성으로 인해 생산 관계를 다룬 연구에서조차 모건(Lewis Henry Morgan, 1818-1881)이나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이론에 만족할 뿐, 중국의 강력한 자료를 활용하여 생활 체계나 취락 형태, 교역 등을 더 깊이 분석하여 일반 사회과학 이론을 도출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음은 아쉬워한다.60) 그럼에도, 1970년대까지 축적된 다양한 지역의 방대한 고고학 성과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최근 30년 동안 중국 고고학 연구의 주요 향방을 결정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1981 년 발표되어 중국 내 고고학 연구의 강력한 “지역주의”를 낳은 소병기의 “구계유형론”이다. 이 문제는 II장 2절에서 상술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전통 역사학의 시기 구분에 따른 고고학 시기 구분의 확정과 그 내실화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는 1996년 지난 100년 동안 중국 고고학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 中國 考古學 시리즈 총 9권을 기획했다. 현재까지 中國考古學·新石器卷(2010), 中國考古學·夏 商卷(2003), 中國考古學·兩周卷(2004), 中國考古學·秦漢卷(2010), 中國考古學·魏晉南北 朝卷(2018)의 다섯 권이 방대한 저작이 출간되었다.61) 총 9권 중 6권이 역사고고학에 속하 듯, 사마천의 사기 등 전래문헌에 언급된 하, 상, 서주, 동주, 진, 한, 위진남북조 등 시대의 역사를 고고학 성과로 뒷받침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시대별 내용을 추가해서 더욱 풍성 한 역사로 채우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경우 우선 중국 전역

의 방대한 성과를 상세히 나열하 고, 인골 등 자료에 의존하여 각지의 종족 계통(8장)을 다룬다. 마지막 문명 기원에 대한 탐구 (9장)에서 용산문화에 해당하는 기원전 2600~2000년 사이에 여러 지역에서 거대 성읍을 중심으로 한 왕권 국가가 출현했고, 기원전 1세기에 완성된 사기 「五帝本紀」에 언급된 堯舜禹 의 전설이 이에 부합한다고 결론짓는다.62) 이 문제는 전통 역사학의 잔영이 유례없이 강한 중 국 고고학의 역사 지향성63)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한편, 서양 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은 하 상주단대공정64)이나 2004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중화문명탐원공정을 비롯한 대형 국가 주도 학술사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셋째, 두 번째와도 연관된 중원 중심 단선적 역사관의 문제로 서양학계와 첨예한 논쟁을 촉 발하고 있다. 예컨대, 1986년 발굴되어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은 사천성 삼성퇴 유적은 二里頭文化 이래로 중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 왕조의 주변 고고학 문화로 다루어지고 있 다.65) 프린스턴대학의 로버트 베글리는 기원전 제2천년기 후반에 삼성퇴를 비롯하여 중원의 상과는 엄연히 다른 문명들이 오늘날 중국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에서 상만 부각 된 전래문헌의 도식에 집착함을 지적한다.66) 이러한 논쟁은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되는데, 2012 년 북방지구인 섬서성 동북부 황토고원에서 발굴된 기원전 2300~1800년에 존속했던 중국 신 석기시대 최대 규모(400헥타르)의 石峁 유적67)을 둘러싼 논쟁이 그 좋은 사례다.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여타 지역과 비견되기 어려울 정도의 정치 체제와 규모를 갖춘 석묘를 변방이 아닌 중국 역사상 최초의 도시 중심 혹은 국가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거기서 출토된 도기나 옥기를 비롯한 몇 가지 양상이 당시의 다른 중심인 산서성 서남부의 陶寺 지역이나 洛陽 분 지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토대로, 석묘의 정치권력이 군사적 팽창으로 먼저 도사를 정복한 이 후 이리두를 비롯한 중원의 핵심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68) 일각에서는 석묘를 사기 등 전래문헌에 중국 최초의 통치자로 등장하는 黃帝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Yitzchak Jaffe 등은 이러한 시도를 중국 학계의 고질적인 단선적 역사 이해의 산물로 일축한다. 기원전 제3천년기 후반에 황하 중하류에 20곳 이상의 대형 성읍들이 공존했고, 석묘의 중원으로 팽창 을 주장한 도기 등의 근거가 초보적이어서, 그 유적은 여러 측면에서 중원보다 오르도스나 내 몽고 남쪽 지역과 연관성이 강한 별개 지역의 핵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 다. 오늘날 도로로 최단 거리가 700km 이상인 석묘와 이리두 사이의 정치적 문화적 연계 여 부를 둘러싼 논의는 뒤에서 다룰 지역주의나 의고·신고 논쟁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이 논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석묘라는 중국의 사례가 Current Anthropology에서 “인류학이론 포럼(Forum on Theory in Anthropology)”으로 다루어질 정도로 중심 주제가 되었고 (후술), 그 논의를 촉발한 중국 학자들의 영문논문(각주 68)이 2019년 Antiquity의 고고학 분 야 우수 저작에 선정된 점이다.70)

중국의 고고학을 둘러싼 논의

가 이처럼 세계 고고학계의 핵 심 이슈로 부각하고 있는 양상은 필자가 네 번째 경향으로 주목하는 중국의 풍부한 고고학 자 료를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데이터 역사과학의 부상을 통해서도 입증된다.71) 1949년부터 1990 년까지 40년 동안 국제 고고학계로부터 고립된 중국은 특히 통계학에 기초한 고고학 연구 방 법에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72)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국제적 학제 간 공동연구 형태를 띤 정량적 연구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각주 131 참조), 유적들의 시공간 분포나 고대의 환경 과 기후, 농업, 인구, 지리, 국가 등 고대문명 발전에 대한 보편적 질문에 중국의 사례가 점점 더 중시되고 있다.73) 이러한 새로운 추세에도 불구하고 민국 시기부터 분출한 황제나 北京猿人 중심의 민족 통 합과 기원 담론에 이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공통된 역사와 토양, 혈연 인식에 뿌리를 둔 민 족 귀속감이라는 신화 구축”이 중국 학계의 목표 담론이라는 점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 다.74)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볼 고대 중국 연구에서의 “지역주의”와 “의고·신고” 논쟁은 그러한 일관된 흐름과 연관된 중국 고대문명 연구의 특이한 현상이다.